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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감상
  백석(白石)의 시 ‘고방’에 나타난 특권적 어린 시절
김옥순(金玉順) 국립국어원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내를 내어가며 나와 사춘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먹었다/ 제사ㅅ날이면 귀먹어리 할아버지 가에서 왕밤을 밝고 싸리꼬치에 두부산적을 께었다/ 손자아이들이 파리떼 같이 뫃이면 곰의 발 같은 손을 언제나 내어둘렀다/ 구석의 나무말쿠지에 할아버지가 삼는 소신 같은 집신이 둑둑이 걸리어도 있었다/ 녯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끼때에 불으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고방’, 『사슴』, 1936)

  백석(白石, 1912〜?))은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의 청산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평안도 사투리로 시어를 구사하고 어린 시절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보고 들은 평안도의 풍습과 고향 사람을 체험적으로 묘사한 향토적인 시를 썼으나 그 감각은 매우 현대적이어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끼게 한다. 그의 시 ‘고방’을 보면 어린 아이 적의 시인이 제삿날 전후해서 사촌과 함께 할아버지 댁의 고방에 숨어서 장난치던 때를 그리고 있다. 고방(‘광’의 원말)에는 송구떡(‘송기떡’, 소나무의 속껍질을 멥쌀가루에 섞어 반죽하여 만든 떡)이랑 찹쌀 탁주가 낡은 질동이와 오지 항아리에 담겨 있고 구석의 나무 말쿠지(옷 따위를 걸기 위하여 벽에 박은 못)에는 짚신이 둑둑이(한 둑이는 10개를 의미하므로 둑둑이는 많이 있다는 뜻) 걸려 있고 컴컴한 구석에는 쌀독이 있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말하는 이가 어린아이인 만큼 관심은 오로지 먹는 데에 있어서 주변 세계에 대한 묘사도 음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집 갔다가 사연이 있어 친정에 돌아와 눈칫밥을 먹고 있는 집난이(출가한 딸을 친정에서 부르는 말, 여기서는 이 집안의 딸 얘기가 아닐 수도 있음)를 낡은 질동이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인기가 없는 송기떡에 비유한다든가, 제사 음식을 먼저 먹으려고 달려드는 손주들을 막는 할아버지의 손을 곰 발바닥에 비유한다든가 하는 것도 흥미롭다.

늙은 집난이가 -------- 오래된 송기떡이
갈 줄 모르고 --------- 업어지지 않고 (먹지 않은 채)
(친정에) ----------- 낡은 질동이에
붙어 있다 ----------- 붙어 있다.
할아버지가 ---------------- 곰이
손주들을 ------------------ 파리떼를
제사 음식에서 -------------- 꿀에서(먹이에서)

떼어놓으려고
손을 내어 두르다

  할아버지의 손이 곰 발바닥에 비유됨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삼는 신발(짚신)은 소가 신는 신에 비유되고 있다. 너무 늙어서 귀가 먹은 할아버지는 농사일로 크고 두텁게 굳어진 손과 발을 지녀서 시 속의 어린 주인공에게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곰 발바닥이나 소의 신발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일하는 사람의 손은 굵어진다고 했던가.
  또한 흥미로운 것은 한국의 어린아이, 특히 사내 아이에게 주어진 특권 의식이 이 시에 잘 나타나는데, 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맏 손주의 특권이다. 고방에 숨어서 삼촌의 ‘임내’(입내: 소리나 말로써 내는 흉내)를 내면서 어른처럼 찹쌀 탁주를 마신다든가, 감히 앉기 어려운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서 왕밤을 밝거나(까거나), 싸리 꼬치에 두부 산적을 꿰는 중요한 일(?)을 맡거나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절정은 마지막 구절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 시 속의 주인공은 어른 몰래 고방에 숨어서 야금야금 음식을 먹어 이미 배가 부른 차라 저녁끼 때에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도 먹는 일에 초연한 척(?) 못 들은 척 하고 있는 모습이 독자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한 집안에서 사랑 받는 큰 손주가 아니더라도 어린아이 시절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황금기이다.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던 시절(학교 들어가기 전 단계). 영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에게 마법 선생이 그가 마법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라도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려야 한다고 말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에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소중한 추억이다. 이 시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행복했던 추억만을 그리고 있다기보다 제삿날 음식 준비하는 남자들의 세계나 평안도 시골의 고방 풍경, 시집갔다가 잘 살지 못하고 친정에 돌아와 눈칫밥을 먹고 있는 집난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표현되어 1930년대의 평안도 풍속도가 문화인류학자의 민속지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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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