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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걱’의 어원
홍윤표(洪允杓) 연세대학교
  밥 같은 것을 푸는 데 쓰는 도구가 ‘주걱’이다. 그래서 ‘주걱’이라고 하면 으레 ‘밥주걱’을 말한다. 그런데 이 ‘밥주걱’의 생김새 때문에 여러 단어가 생겨났다. 턱이 유달리 길고 앞으로 굽은 턱을 ‘주걱턱’이라고 하고, ‘구두’를 신을 때 쓰는 도구도 주걱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구둣주걱’이라고 한다. ‘끈끈이주걱’이나 ‘주걱버섯’ 등의 식물 이름도 주걱의 모양에 따라 붙인 것이다. ‘뼈’에도 ‘주걱뼈’가 있다. ‘부삽’의 모양이 주걱과 비슷하다고 해서 충청도에서는 ‘부삽’을 ‘불주걱’이라고도 한다.
  이 ‘주걱’은 더 이상 분석될 것 같지 않다. ‘주걱’이 두 음절로 되어 있어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은 기껏해야 ‘주 + 걱’, ‘죽 + 억’, ‘주거 + ㄱ’ 중의 하나일 게다. 이렇게 임의로 분석한 형태들을 ‘주걱’의 의미와 연관을 시켜 보려고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언뜻 떠오르는 해답이 없을 것 같다. 그렇지만 실제로 ‘주걱’은 ‘죽 + 억’으로 분석된다. ‘-억’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뜨럭’이 ‘뜰 + -억’으로 되어 있고, ‘주먹’은 ‘줌 + -억’으로 되어 있는데, ‘주걱’에서 분석되는 ‘-억’도 이때의 ‘-억’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무엇일까? 원래 ‘주걱’의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 초기 형태는 ‘주걱’이 아니라 ‘쥭’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1446년)에 이미 ‘쥭爲飯臿’(‘쥭’은 ‘반삽’이다)이라는 예가 등장한다. ‘반삽(飯臿)’은 ‘주걱’을 말한다. 〈몽유편〉(蒙喩篇, 1810년)이라는 책에 ‘반삽’(飯臿)을 ‘주걱’이라고 풀이하고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반’(飯)은 ‘밥’이고 ‘삽’(臿)은 ‘가래’라는 뜻이니 ‘반삽’(飯臿)은 곧 ‘밥을 뜨는 가래’ 즉 ‘밥주걱’을 일컫는 것이다. ‘주걱’을 나타내는 ‘쥭’은 문헌상으로는 16세기까지만 나타나지만, 방언에서는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밥쥭 쵸() 나므쥭 쟉(杓) (훈몽자회<1527년>)
박죽 <강원>, <전남>[신안, 해남, 진도, 완도], <평북>, <평남>, <함남>[문천, 삼수, 함흥, 홍원], <황해>[송화, 은율]
밥죽 <평북>[선천], <함북>[청진], <함남>[함흥]
  훈몽자회에 보이는 ‘밥쥭’은 ‘밥주걱’을, ‘나므쥭’은 ‘나무주걱’을 말한다. 필자 이름 중의 한자 ‘표’(杓)는 원래 그 음이 ‘쟉’이었는데, 그 뜻은 ‘나무주걱’을 뜻하는 것이었다. 20세기에 와서야 그 음이 ‘표’로 바뀐 것이다. ‘주걱’의 초기 어형이 ‘쥭’이었고, 그 형태가 오늘날에는 일부 방언에서만 사용되고 있으니, ‘주걱’이 더 이상 분석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쥭’에 접미사 ‘-에’가 붙어서 만들어진 ‘쥬게’가 17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쥬게’는 ‘쥭 + -에’로 분석되는데, 이 접미사 ‘-에’는 접미사 ‘-애’와 함께 사물의 도구나 기구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보통은 ‘마개’(‘막- + -애’)처럼 동사 어간에 붙는 것이 일반적인데, 명사 ‘쥭’에 직접 붙은 것이 특이하다. ‘쥭’으로 그대로 쓰이지 않고 ‘쥭’에 접미사가 붙은 ‘쥬게’로 변화한 이유를 알려면, 이 ‘쥭’과 동음이의어 관계에 있는 ‘쥭’(粥)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먹는 죽인 ‘쥭’(粥)은 한자어이면서 성조(聲調)가 거성(去聲)인 반면, 주걱의 뜻을 가진 ‘쥭’은 음상은 동일하지만 성조는 평성(平聲)이어서, 성조가 사라진 17세기 이후에는 두 ‘쥭’은 소리는 같지만 뜻이 서로 다른 동음이의어가 된 것이다.
다릿 고기 베혀 쥭에 섯거 머기니 도로 사라 <삼강행실도(1471년)>   두 호쥭을 오 <내훈언해(1475년)>
  이러한 동음충돌(同音衝突)을 피하기 위해 ‘주걱’을 뜻하는 ‘쥭’에 접미사를 붙여 ‘쥬게’를 만들어 ‘쥭’과 충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목적은 성공한 셈이어서, 오늘날에는 ‘먹는 죽’과 ‘주걱’은 전혀 다른 소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사발 뎝시 술져 나모쥬게 죠솔 슉칼 키 얼멍이 <박통사언해(1677년)> 졉잔 壺甁 쥬벼놋쥬게다 收拾여 두라 <박통사언해(1677년)> 나모 쥬게(榪杓) 놋 쥬게(銅杓) <역어유해(1690년)> 쥬게(柳瓢) <동문유해(1748년)> 수져와 나모쥬게와 됴리와 솔과 슉 칼과 키와 <박통사신석언해(1765년)> 燈臺와 잔과 쥬벼와 놋쥬게 이시니 <박통사신석언해(1765년)> 쥬게(柳瓢) <몽어유해(1768년)>
  이렇게 ‘쥬게’가 18세기까지 쓰이다가, 18세기 말에 다시 ‘쥭’에 접미사 ‘-억’이 붙은 ‘쥬걱’이 등장한다.
左右 飯匙骨이 쥬걱 뼤라 <증수무원록언해(1792년)> 쥬걱으로로밤와 <규합총서(1869년)>작작 너코 쥬걱으로 져으면 <규합총서(1869년)> 쥬걱(飯匙), 쥬걱새다, 쥬걱턱(長頷) <한불자전(1880년)> 나무쥬걱(柳杓) <광재물보(19세기)>모히 붕긋며 밋치 쥬걱 모양흔 부리 밀어 밥을 완연이 먹거<김원전(19세기)> 쥬걱우러니 쳔고졀이오 <삼설기(19세기)> 즁인이 모힌 곳의 방귀여 본 일 업고 밥쥬걱 업허노와 니를 죽여 본 일 업<삼설기(19세기)>
  ‘쥬게’가 왜 ‘쥬걱’이 되는지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없다. ‘쥭’이라는 어기에 서로 다른 접미사를 취한 셈인데, 대개 다른 접미사가 통합되면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인데, ‘-게’ 접미사를 취한 ‘쥬게’와 ‘억’ 접미사를 취한 ‘쥬걱’은 그 뜻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 같다. ‘나모쥭’과 ‘나모쥬게’와 ‘나무쥬걱’이 모두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 ‘쥬걱’의 ‘쥬’가 단모음화되어 ‘주’가 됨으로써, 오늘날의 ‘주걱’이 되었는데, 이 ‘주걱’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세기에 와서의 일이다.
주걱 (飯臿) <몽유편(1810년)> 주걱으로조 졋고박이에 펴노코 <규합총서(1869년)>
주걱(食械) <한불자전(1880년)> 주걱(廚械 盛飯具), 주걱턱 <국한회어(1895년)> 顉㶊 걱턱 <광재물보(19세기)> 이놈의 화상 보소 말머리 주걱턱이 하릴업는 옹갈레라 <옹고집전(19세기)> 넓죽한 입과 기다란 주걱턱 <(1948년)>
  ‘주걱턱’이 등장한 것은 19세기의 일이지만, ‘구둣주걱’의 출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구둣주걱’은 외국어 ‘구두 헤라’를 순화시켜 만든 말일 것인데, 필자가 젊었을 때에는 ‘구두칼’이라고도 하였다.
  결국 ‘주걱’은 15세기 이후부터 16세기까지는 ‘쥭’으로 쓰이었다가, ‘먹는 쥭’(粥)과 동음충돌을 피하기 위해 ‘쥭’에 접미사 ‘-에’가 붙은 ‘쥬게’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 같은 어기(語基)인 ‘쥭’에 접미사 ‘-억’이 붙은 ‘쥬걱’이 등장하여 오늘날에는 ‘주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사물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렇게 역사적으로 변화를 겪은 것도 흥미롭거니와, 그러면서도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사용된 ‘쥬게’에나, 18세기 말부터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쥬걱’(또는 ‘주걱’)에나 모두 원래의 초기 형태인 ‘쥭’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은 더욱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언중들은 ‘쥭’과 ‘쥬게’와 ‘쥬걱’(또는 ‘주걱’)이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의 신비인 것이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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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