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을 했어요 우리 시 다시 보기
신문 제목 다시 보기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말의 뿌리를 찾아서 교실 풍경
문화 들여다보기 일터에서 말하다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국어 관련 소식
우리말 다듬기
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 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 고개를 멫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녕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집에는 언제나 센개 같은 게사니가 벅작궁 고아내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 히물쩍 너들씨는데
집에는 아배에 삼춘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능 그늘 밑에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두고 김을 매려 단녔고 아이들이 큰마누래에 작은마누래에 제구실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뙈기에 말려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끼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덜 수대로 주룬히 늘어놓고 밥 한 덩이 질게 한 술 들여트려서는 먹였다는 소리를 언제나 두고두고 하는데
일가들이 모두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는 구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채리를 단으로 쪄다두고 따리고 싸리갱이에 갓진창을 매여놓고 따리는데
내가 엄매 등에 업혀가서 상사말같이 향약에 야기를 쓰면 한창 퓌는 함박꽃을 밑가지채 꺾어주고 종대에 달린 제물배도 가지채 쪄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알도 두 손에 쥐어주곤 하는데
우리 엄매가 나를 가지는 때 이 노큰마니는 어늬 밤 크나큰 범이 한 마리 우리 선산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을 우리 엄매가 서울서 시집을 온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다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녀기는 것이었다
백석,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1939.4., 「文章」1권 3집


   백석(白石, 1912~1995)의 시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고개 너머 집에 사는 범 같은 노할머니)에서 중심적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가축과 아이들과 어린 나’이다. 그리고 그 집의 권력자는 ‘노할머니’이시다. 노할머니는 마귀처럼 무섭기도 하고 다른 편으로는 한없이 자애롭기도 하다. 이 시의 등장인물들은 동화의 주인공 같다. 이 시에서 말하는 이가 가장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어린이라는 점도 동화적 관점을 보인다.
   여섯 단락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번호 표시는 필자가 했음) 자세히 보면 각 단락마다 맺음이 없이 “○○한데------”와 같은 중단형으로 끝난다. 중단형의 어법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면서 6단락에 와서야 맺는 한 문장 구조 체제를 보여준다. 각 단락은 자세한 묘사적 서술로 되어 있다. 1단락의 귀신이 나올 듯한 산마루의 묘사라든가 짐승들이 신나게 사는 집을 묘사한 2단락이든가 어린아이들이 자라고 죽는 모습이 눈에 선한 3단락이라든가 어린아이들이 회초리로 매 맞는 4단락이라든가 악을 쓰는 아이가 등장하는 5단락이라든가 모두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고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내용 파악이 어려울 것 같아 단락별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단락을 보면 “황토 마루(산꼭대기) 수무나무에 얼럭궁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뜯어진 헝겊 조각) 뵈짜배기(베조각) 걸리고 오쟁이(짚으로 만든 그릇) 끼애리(꾸러미) 달리고 소 삼은(성글게 엮은) 엄신(엄짚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국사당) 고개를 멫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녕동(영동: 기둥과 마룻대)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이다. 즉 황토로 된 산꼭대기에는 성황당 나무인 시무나무가 있고 거기에 여러 사람들이 와서 질병에서 벗어나거나 각종 소원을 빌기 위하여 치성을 드렸다. 그 뒤끝으로 헝겊 조각이나 짚으로 만든 물건들이 나무에 걸려있다. 그런 고개를 지나기 두려워서 침을 여러 번 뱉으면서 한참을 넘어가야 골짜기가 나온다. 그 골짜기에는 오래 묵은 큰 기와집이 있다.
   2단락을 보면 “집에는 언제나 센개(흰 개) 같은 게사니(거위)가 벅작궁 고아내고(법석대며 떠들어대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아직 다자라지 못한 송아지) 히물쩍(씰룩거리며) 너들씨는데(함부로 까부는데)”와 같이 가축들의 세상이다. 거위는 흰 개같이 크고, 개는 말같이 크고, 송아지들이 함부로 까부는 동물농장과 같은 집이 나타난다.
   3단락을 보면 “집에는 아배에 삼춘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능(푸르고 시원한 언덕) 그늘 밑에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두고 김을 매려 단녔고 아이들이 큰마누래(큰마마의 평북 방언, 천연두)에 작은마누래(작은마마의 평북 방언, 수두)에 제구실(어린아이들이 으레 치르는 홍역이나 역질)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뙈기에 말려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끼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덜 수대로 주룬히 늘어놓고 밥 한 덩이 질게(반찬의 함경 방언) 한 술 들여트려서는 먹였다는 소리를 언제나 두고두고 하는데”이다. 여기서는 그 큰 동물농장 같은 집의 가족들이 소개된다. 부모는 농사일을 하느라 어린 젖먹이를 봐 주지도 못하고 마을의 시원한 언덕에 하루종일 뉘어 두었다. 좀 더 자란 아이들은 천연두나 수두를 앓았다. 요즘에는 부모들이 소아과에 가서 각종 예방주사를 맞게 해서 그런 일이 없지만 예방주사가 발달하지 않은 예전에는 천연두를 많이 앓아 곰보가 흔했다. 그리고 앓다가 죽은 아이는 관을 짜지도 않고 거적때기에 싸서 땅에 묻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하도 아프니까 잘 알지도 못하고 죽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에서는 참담한 현실이 느껴진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잃지 않으려고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부뚜막에 놓고 큰마마, 작은마마가 물러가기를 기원했다.
   4단락을 보면 “일가들이 모두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노할머니, 증조할머니)는 구덕살이(구더기의 평북 방언)같이 욱실욱실하는(여럿이 한데 많이 모여 몹시 들끓는 모양)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채리를 단으로 쪄다두고 따리고 싸리갱이에 갓진창(갓끈창)을 매여놓고 따리는데”이다. 노할머니가 많은 손자, 증손자를 다스리느라고 회초리를 단으로 쪄다 놓고 때리는 모습이 흥미롭다.
   5단락을 보면 “내가 엄매 등에 업혀가서 상사말(야생마의 평북 방언))같이 항약(악을 쓰며 대드는 짓을 뜻하는 평북 방언)에 야기(어린아이들이 불만스러워서 야단하는 짓)를 쓰면 한창 퓌는 함박꽃을 밑가지채 꺾어주고 종대(식물의 줄기)에 달린 제물배(제사에 쓰려는 배)도 가지채 쪄주고(베어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알(거위알)도 두 손에 쥐어주곤 하는데”이다. 늘 회초리로 사촌들을 혼내시는 무서운 노할머니도 어린 주인공인 내가 방문했을 때는 대단히 환대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나타나는 비유의 층위도 아주 달라진다.

   즉 노할머니가 범이라면 어린 나는 야생마인데 노할머니의 손자들은 구더기에 비유된다. 어린 나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다.
   6단락을 보면 “우리 엄매가 나를 가지는 때 이 노큰마니는 어늬 밤 크나큰 범이 한 마리 우리 선산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을 우리 엄매가 서울서 시집을 온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다견하니 알뜰하니 기꺼이 녀기는 것이었다”이다. 어린 내가 무서운 노할머니에게 대단하게 대우를 받는 이유가 세 가지로 설명된다. 노할머니가 꾼 나의 태몽 때문이고, 우리 어머니 때문이고, 내가 노할머니 친정집의 종손이기 때문이다. 6단락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노할머니와 나와의 관계를 표로 그려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보면 이 시는 백석의 탄생 신화를 알려 주는 중요한 시이다. 백석이 집안에서 크게 될 인물이라고 예견됐음을 알 수 있다. 백석은 집안의 종손으로 가문의 대를 이어갈 중요한 자손으로 귀하게 길러졌음을 알 수 있다. 백석의 어머니는 노할머니에게는 ‘조카 손자며느리’이다. 즉 나의 할아버지가 노할머니의 조카이니까 할아버지 아내는 조카며느리이다. 나의 아버지가 노할머니의 조카 손자이니까 할아버지 아내는 조카 손자며느리이다.
   그런데 이 시는 백석을 중심으로 한 영웅(?)의 탄생신화이기도 하지만 주된 관심사는 처음에 말했듯이 어린이들이다. 병든 어린아이가 죽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바가지에 음식을 담아 귀신에게 바치는 민속이라든가, 병들어 죽은 아이 송장을 매장하는 방법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건강하고 극성스러운 어린아이는 매로 엄히 다스렸는데 찐 들매나무나 싸리갱이를 회초리로 썼다. 귀한 아이를 대할 때에는 함박꽃을 꺾어 주고, 제사에 쓸 배를 주고, 거위 알을 두 손에 쥐어 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대했는데 건강하고 극성스러운 아이들을 대할 때랑은 천양지차로 다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 등에 업혀서 왕자처럼 지내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소상히 기억하는 이도 드물 것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탄생 신화가 그려진 이 시가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