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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다듬기
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창피한 고백 두 가지. 하얀색 또는 갈색이고 만질만질하며 분필처럼 땅에 금을 그을 수 있는 돌이 있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이 돌이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 돌은 비석치기나 오징어 놀이의 금을 그리는 데 쓰였고, 별다른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더없이 유용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들은 이 돌을 ‘국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이 먹고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국돌’이란 단어는 없었다. 사투리인가 보다 하며 지나쳤다가, 우연한 기회에 이 돌 이름이 ‘국돌’이 아니라 ‘곱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받아쓰기’ 대상이 아닌 단어들은 이렇게 들리는 대로 기억되고 또 이런저런 기회로 슬그머니 고쳐지기도 한다. 자라면서 배웠으면서도 표준어가 아닌 단어들은 나이 들어서도 서로 다른 형태로 각자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주름 제거나 근육 질환 치료에 쓰이는 ‘보톡스(Botox)’라는 낱말을 처음 들었을 때이다. 주사로 시술한다는 소리를 얼핏 들은 나는 이 단어를 ‘보턱수’라고 들었고, (얼굴을 대표하는) ‘턱’을 ‘보정(補正)’하는 (신비의) ‘물(水)’이라고 추리했다. 이런 나의 그럴듯한 추리를 전해들은 주변 사람들은 한동안 나를 무식쟁이란 말과 함께 멸시 천대했다. 처음 듣는 말은 언제나 오해나 오독, 오청(誤聽)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것을 쥐 잡듯이 다그쳐서는 안 된다.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는 아침마다 의료기기를 팔러 나가는 길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엉터리 어린이집에 아들을 맡기러 간다. 그는 매번 동네 벽에 쓰인 낙서의 철자법이 틀렸다고 투덜댄다. ‘happiness’라고 써야 하는데, ‘happyness’라고 쓰여 있기 때문.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틀린 말, 수정해야 할 말들이 그득하다. 그런데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는 법. 그 사람의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손가락질을 하든 다른 대책을 마련해 주든 하는 게 순서이다.
   누구든지 가장 본질적이라서 공격적이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질문이 “왜 그렇게 쓰는데?”, “다르게 쓰면 안 돼?”라는 말이다. 얼마 전에 받은 질문은 ‘그런데’라고 할 때는 왜 ‘데’고, ‘요컨대’라고 할 때는 왜 ‘대’냐는 것이었다. 답하기 참 어렵다. 물론 중세국어에 ‘-건대’라는 형태가 있고, ‘그런데’에 쓰인 ‘-데’(정확히는 ‘-ㄴ데’)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답하지만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이 답에 “그럼 ‘-건데’라는 꼴은 정말 없었냐, 쓰면 안 되냐”고 재차 물어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정확히 말해서 없었던 건 아니고, 현대 국어에서 국어학자들이 ‘-건데’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건대’와 형태적으로 연결되는 꼴로 ‘-건댄’이 있는데, 이 형태는 ‘-건덴’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석보상절>이란 책에 ‘일로 헤여 보건덴[이것으로 헤아려 보건대]’이라고 나온다. 철자법이 없던 시대의 문헌 자료에서 이 표기는 틀렸다고 말하기 곤란하다는 점에서, 사실 ‘-건대’는 필연이라기보다는 ‘선택’에 의한 사용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쉬운 말로 하면 ‘그냥 그렇게 쓰기로 했다.’ 정도의 말이 된다. 그렇다면 ‘-건데’라고 쓰면 정말 안 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는 강제된 규칙에 길들여져 있다. 현상에 대한 설명도 ‘유일’하길 기대한다.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고 하면 자신감이 없다고 말한다. 화끈하게 단정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보다 단순명쾌한 “족집게” 선생이 더 인기 있다.
   오늘은 만인이 ‘틀렸으니 쓰지 말라’고 언도한 표현 몇 개를 변론해 보려고 한다. 이런 변론으로 이 ‘틀린 말’이 당당히 복권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너무 심려치는 말라. 다만 이러한 문제아들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그것이 우리가 언어를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 의도나 연원에 따라 말을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이러한 변론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말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랑이 오직 ‘예쁜 얼굴’만을 보는 것일 수는 없다. 전면적 사랑은 잠에서 갓 깨어난 부스스한 얼굴, 뒷간에서 끙끙대며 일보는 모습, 사소한 일에 세상을 뒤집어 엎을 듯 성질부리는 장면 모두를 허용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가늠하려면 ‘틀린 말’에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를 보는 것도 한 가늠자가 될 것이다.
   하나. ‘-길래’는 ‘-기에’의 잘못! ‘-기에’와 ‘-길래’가 의미가 같으며 단수 표준 어미 규정에 따라 연결어미 ‘-길래’를 ‘-기에’의 비표준형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국어학자 안주호 교수는 이와 다른 주장을 한다. ‘1등이기에/*1등이길래 할 수 있는 일’, ‘이 사람은 본교의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였기에/*이수하였길래 이 졸업장을 수여함’에서처럼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쓰이는 환경과 의미가 자못 다르기 때문에 "‘-길래’는 ‘-기에’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둘. ‘저희 나라’는 안 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을 듣다 보면 출연자가 사회자의 타박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제일 많은 지적을 받는 표현이 ‘저희 나라’이다. 대담자가 ‘저희 나라’라는 말을 할 때면 그 말이 거슬리는지 아나운서는 ‘우리나라죠’ 하며 끼어든다. 어떤 때는 ‘우리나라’라고 고쳐 줘도 계속 ‘저희 나라’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학창 시절 어느 선배는 모꼬지에서 ‘한마디’ 한다며 “저희 학과가 …”라는 말을 하다가 교수의 ‘열 마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저희 학과’면 난 뭐냐? 난 국문과 아니냐?"하는 비아냥거림을 당해야 했다. ‘저희 나라’, ‘저희 학과’를 써서는 안 되는 이유로 두 가지가 제시된다. 하나는 ‘저희’라는 뜻이 ‘듣는 사람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낮추는 것이므로, 우리끼리 말할 때 쓰면 겸손한 표현이 아니라 자기 비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아버지, 마당은 저희가 청소할게요’처럼 ‘저희’가 듣는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뜻할 수 있어 한 모둠의 구성원일 경우에는 기분이 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 ‘틀린 말’을 자주 쓸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 ‘저희 나라’가 쓰이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표현이 ‘우리나라’가 쓰일 때와 똑같지 않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저희 나라’는 아무 조건 없이 쓰이지 않는다. ‘저희 나라’를 쓸 때는 항상 상대방이 존대 받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쓰인다. 나이나 지위 따위에서 듣는 이를 존대하려는 의도가 있을 때 쓴다. 손윗사람이나 다수 대중 앞에서 ‘저희 나라’라고 쓰지, 친구나 아랫사람들 앞에게 이 표현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희 나라’는 틀린 말이 아니라, 이유 있는 사용이라고 볼 수 있다. 담화상의 책략에서 나온 것이지 ‘아무 생각 없이’ 쓰지 않는다. (이상은 국어학자 목정수, 백낙천 교수와의 술자리 담소 내용)
   셋. 문장론이나 논술 책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제일 …한 것 중의 하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중에 하나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 분이다.’라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므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라거나, ‘내가 좋아하는 과일 중에 하나이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하나이다.’로 써야 한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분명히 모순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소설 중에 하나”라거나, “모니터 중에서 제일 괜찮은 거 하나만 추천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제일’의 뜻을 가지므로 ‘가장’을 쓰면서 여럿을 지칭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
   그런데 이 ‘틀린’ 표현은 영어에서도 흔하다. 최근 영국 BBC방송은 우리의 이번 대선을 두고 “대한민국이 1987년 대통령 직접 선거를 도입한 이래 ‘가장 지저분한 선거 중 하나(one of the dirtiest)’를 치렀다.”고 표현했다.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one of the greatest conveniences’, ‘one of the biggest sources’, ‘one of the dirtiest job’, ‘one of the league's best’, ‘one of the body's dirtiest parts’처럼 「one of the 최상급」 표현을 흔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영어도 틀렸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이 ‘가장’이라는 최상급을 쓰면서도 거기에 포함되는 대상들을 복수로 상정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가장’이 ‘유일성’보다는 대상의 중요성이나 시급성을 ‘강조하는’ 정도로 의미를 바꾸어 쓰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넷. 너무! 요즘에 사람들이 ‘너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쓴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법상 ‘너무’는 부정적인 말과 함께 어떤 한계보다 지나치거나 분에 넘치는 경우에 쓴다. ‘너무 고생한다, 너무 아프다, 너무 어렵다.’ 등에 쓰인다. 그런데 이 말이 ‘너무 착하다, 너무 좋다, 너무 예쁘다, 너무 먹었다, 너무 잘 생겼다.’처럼 긍정적인 말에도 쓰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낱말들 중에는 자기 주위에 긍정적인 의미나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낱말과 함께 쓰는 것들이 있다. 이를 의미적 선호(semantic prosody)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저지르다’라는 동사는 ‘잘못이나 범죄’와 관련된 어휘와 자주 쓰인다. 그래서 ‘일’처럼 중립적인 뜻을 갖는 어휘와 함께 쓴 ‘일을 저지르다.’라는 표현에서도 ‘저지르다’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렇다면 ‘너무’라는 낱말이 부정적 어휘들과 자주 결합하는 의미적 선호를 보였다가, 지금은 긍정적인 어휘에까지 그 의미적 선호가 확장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쓰는 말들은 굳어 있지 않고 항상 흔들리고 있다. 국어학자들은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처럼 럭비공처럼 불쑥 엇나간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으면서도, 규범의 덫에 걸린 의미의 작은 떨림에는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관용의 최대치는 존재의 이유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틀렸다고만 하지 말고 그 말이 왜 언중들에게 널리 쓰이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말을 바꾸고 의미를 변경하려는 사람을 응시할 때, 우리의 언어놀이를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왜 이리 ‘틀리다’라는 말을 많이 쓰는 건가? ‘차이’보다는 ‘차별’ 의식의 반영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