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있는 글 우리말 다듬기
이런 일을 했어요 우리 시 다시 보기
신문 제목 다시 보기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말의 뿌리를 찾아서 교실 풍경
문화 들여다보기 일터에서 말하다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국어 관련 소식
노정민(가나다 전화 상담원)
  그동안 가나다 전화에서 근무하면서 겪은 일화를 글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마음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만 교차했다. 불특정 다수의 민원인들을 상대로 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들도 많았지만 얼굴 붉힐 일들도 심심찮게 일어나기 때문에 어떤 일화를 중심으로 써야 할지 다소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곳 가나다 전화 민원실로 전화를 하는 분들 중엔 우리의 주 업무가 어문 규범이나 어법 등에 관한 문의에 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분도 있지만, 언론 매체 등을 통해 전화번호 정도는 알게 됐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고 전화를 하는 분들도 왕왕 있다. 그래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몇 통의 전화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언젠가 할아버지 한 분이 전화를 하셔서는 당신 집의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 알려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셨던 적이 있다. 보일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도와드릴 방법이 없는 안타까운 전화였다. 이렇게 가나다 전화가 국어 규범과 관련된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상담 전화임에도 불구하고 국어와는 거리가 먼, 다른 분야의 전문 지식이나 이런저런 문젯거리를 가지고 질의를 하는 분들이 가끔 있다. 문제집이나 시험에 나온 수학 문제를 풀어 달라고 하거나, 영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묻는 분들도 있는 것을 보면, 그분들은 가나다 전화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정도의 척척박사 전화로 생각하였던 것일까.
  일을 하다 보면 자연히 접하게 되는,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전화도 이렇게 다양하지만, 어문 규범과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사적인 넋두리를 늘어놓으시는 분들의 전화는 우리가 참 난감해 하는 것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당신의 어려운 가정사를 구구절절 말씀하시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물어 온 분께는 그러한 가정 문제를 전문적으로 상담해 주는 곳의 연락처를 안내해 드린 기억도 난다. 그리고 가끔 전화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중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호통을 치거나 견디기 어려운 말을 퍼붓는 분들도 있는데, 냉정을 잃지 않고 친절하게 그런 분들을 응대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다.
  한편 가나다 전화 일을 하면서 겪을 수 있는 재밌는 일 하나는, 특정한 질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 무렵이 어느 때쯤인지 달력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주로 12월에서 2월 사이인데, 초등학교 교과 과정상 진도가 어느 부분에 이르게 되면 특정 어휘에 대한 질문이 쏟아져 들어온다. 처음에는 그러한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교과서를 직접 보고 나서야 우리는 초등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숙제를 하기 위해 가나다 전화에 우리말 어휘의 쓰임을 질문하고 답변을 얻어 가야 함을 알게 되었다.
  가나다 전화로 문의를 하는 분들 중엔 몇 달 동안, 길게는 몇 년 동안 꾸준히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오는 분들도 있다. 그분들과 우리는 서로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정도로 익숙해진다. 그러한 분들 중에 경주에 계신 한 아주머니는 항상 수줍은 목소리로 질문을 하시는데, 물으시는 것 또한 문학소녀가 쓸 법한 내용의 글들인 데다가, 전화를 끊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하셔서 매번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한다. 그런 분들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우리의 답변을 들으시고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며 아이처럼 기뻐하시던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아직 귓가에 생생하다. 그런 분들로 인해 우리는 새삼 우리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일의 성격상 글을 쓰거나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는 분들 문의도 많이 들어오는데, 나중에 책이 출간되었다면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기도 한다. 많지는 않지만 그런 책들이 한권 한권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볼 때엔 힘들었던 기억들이 눈 녹듯 사라진다.
  최근 외국에서도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나다 전화도 그 영향을 받는지 국외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일본, 중국, 미국 등 국외에서 걸려오는 전화의 내용 역시 주로 어문 규범을 비롯해 국어의 올바른 사용에 대한 질문인데, 상담을 하다 보면 다른 나라에 계신 분들도 이렇게 국어에 대해 애착과 열정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들과 통화한 후에는 우리말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반추해 보면서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어느 직장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가나다 전화 업무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큰 보람을 얻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힘들 때보다는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 때가 더 많은 것이 바로 우리 일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