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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말을 다듬는 데에도 나라에서 정한 원칙이 있다. 1948년 당시 문교부가 설치한 국어정화위원회에서 펴낸 ‘우리말 도로 찾기’라는 책의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혀 놓았다.

1. 우리말이 있는데 일본말을 쓰는 것은, 일본말을 버리고 우리말을 쓴다.
2. 우리말이 없고 일본말을 쓰는 것은, 우리 옛말에라도 찾아보아 비슷한 것이 있으면, 이를 끌어다가 그 뜻을 새로 작정하고 쓰기로 한다.
3. 옛말도 찾아낼 수 없는 말이, 일본어로 써 온 것은 다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얻어가지고 새 말을 만들어, 그 뜻을 작정하고 쓰기로 한다.
4. 한자로 된 말을 쓰는 경우에도 일본식 한자어를 버리고 우리가 전부터 써 오던 한자어로 쓰기로 한다.

  광복 직후라는 사회 배경 때문으로 이해되지만, 말 다듬기의 대상을 오로지 일본말 또는 일본식 한자어에만 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당시에는 일본과 일본말에 대한 적개심이 컸을 것이다. 정부도 민족정신을 갉아먹고 원만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일본어를 놔두고선 사회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본말을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요즘엔 주변에서 일본말을 섞어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부 건설업이나 봉제업 또는 인쇄업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일본말이 쓰이고 있다고는 하나 예전처럼 거리낌 없이 쓰는 형편은 못 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일본말을 쓰지 말자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만큼 성공적으로 일본말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아직까지도 국어에 살아남아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꽤 널리 쓰이는 일본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라(假) → 가짜 기스(傷) → 흠(집), 생채기
단도리(段取り) → 채비, 단속 뎃빵(鐵板) → 우두머리
뗑깡(癲癎) → 생떼 무뎃뽀(無鐵砲) → 막무가내
잇빠이(一杯) → 가득, 한껏 곤조(根性) → 본성, 심지
쇼부(勝負) → 흥정, 결판 뽀록나다 → 들통나다, 드러나다
와사비(山葵) → 겨자, 고추냉이 사라(皿) → 접시
요지(楊枝) → 이쑤시개 소바면(蕎麥麵) → 메밀국수
다대기(たたき) → 다진양념 나시(袖無) → 민소매
곤색(紺色) → 감색, 검남색 우와기(上衣) → 윗옷, 저고리
구루마(車) → 손수레, 달구지 시마이(仕舞ぃ) → 마감, 마무리

  앞으로는 이런 말들도 더 이상 쓰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일본말이 우리말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말을 순화하는 문제를 일본식 한자어로까지 넓혀 보면 과연 우리가 지금까지 말 다듬기를 제대로 해 보기나 한 것인가 하는 비판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위에 소개한 4번째 원칙은 일본식 한자어를 쓰지 말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이 국어의 지위를 되찾은 지 60년이 넘은 지금 일본식 한자어에 대한 순화 성적표는 낙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지금도 꾸준히 일본식 한자어가 유입되고 있을 정도인데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다. 특히 일본식 한자어가 들어오기 전부터 엄연히 쓰이고 있던 우리말이 -주로 한자어이긴 하지만- 이제는 옛말 취급이나 받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특히 지식인들이 얼마나 일본식 한자어에 대해 무감각해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 글에서도 일본식 한자어가 더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글쓴이도 모를 지경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표는 새로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가 전부터 쓰이던 우리말을 밀어내고 널리 쓰이고 있는 예들을 보인 것이다. 일본식 한자어는 일본어 고유의 말 만드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므로, 일본식 한자어가 많이 쓰이게 될수록 우리말의 문법을 혼란스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우리말에 널리 퍼져 있는 일본식 한자어를 따로 분류하여 널리 알리고 예전부터 써 왔던 우리말을 다시 살리는 일을 벌여야 할 것이다.

상담(相談) → 의론(議論) 융통(融通) → 변통(變通)
만개(滿開) → 만발(滿發) 보양(保養) → 소창(消暢)
연말(年末) → 연종(年終) 부자유(不自由) → 불편(不便)
시종(始終) → 항상(恒常) 친절(親切) → 친애(親愛)
좌측(左側) → 좌편(左便) 왕복(往復) → 내왕(來往)
우천(雨天) → 우일(雨日) 역할(役割) → 임무분담(任務分擔)
안내장(案內狀) → 청첩(請牒) 두건(頭巾) → 풍당이(風當耳)
모포(毛布) → 담욕(毯褥) 외출(外出) → 출입(出入)
대두(大豆/大荳) → 백태(白太) 풍습(風習) → 풍속(風俗)
기선(汽船) → 윤선(輪船) 재난(災難) → 재앙(災殃)
장소(場所) → 위치(位置) 수선(修繕) → 수보(修補)
비용(費用) → 부비(浮費) 침대(寢臺) → 침상(寢牀)
미인(美人) → 일색(一色) 안내(案內) → 인도(引導)
여비(旅費) → 노자(路資) 처방전(處方箋) → 방문(方文)
목탄(木炭) → 백탄(白炭) 유산(流産) → 반산(半産)
각하(却下) → 백퇴(白退) 소작(小作) → 반작(半作)
전령(傳令) → 파발(擺撥) 보초(步哨) → 파수(把守)
변명(辨明) → 발명(發明) 발의(發議) → 발설(發說)
배상(賠償) → 배보(賠補) 황무지(荒蕪地) → 폐장(廢庄)
수입(輸入) → 입구(入口) 근일(近日) → 일간(日間)
실언(失言) → 망발(妄發) 포식(飽食) → 포만(飽滿)
몰수(沒收) → 몰입(沒入) 방면(放免) → 방송(放送)
다망(多忙) → 분주(奔走) 보증인(保證人) → 보인(保人)
보석(保釋) → 보방(保放) 선착장(船着場) → 포구(浦口)
영수(領收) → 봉입(捧入) 징세(徵稅) → 봉세(捧稅)
인부(人夫) → 모군(募軍) 폐해(弊害) → 폐단(弊端)
후견(後見) → 두호(斗護) 차용(借用) → 득용(得用)
사본(寫本) → 등록(謄錄) 지진(地震) → 지동(地動)
처분(處分) → 치죄(治罪) 예복(禮服) → 직령(直領)
예산(豫算) → 장설(帳設) 보관(保管) → 유치(留置)
사망(死亡) → 하세(下世) 상륙(上陸) → 하륙(下陸)
품행(品行) → 행실(行實) 상여(賞與) → 행하(行下)
견본(見本) → 간색(看色) 타향(他鄕) → 객지(客地)
구제(救濟) → 활인(活人) 청주(淸酒) → 향천(香泉)
지배인(支配人) → 간사인(看事人) 폐지(廢止) → 혁파(革罷)
회원(會員) → 회민(會民) 출산(出産) → 해산(解産)
대리(代理) → 대신(代身) 유일(唯一) → 단지(但只)
목록(目錄) → 단자(單子) 취하(取下) → 식송(息訟)
만기(滿期) → 과숙(瓜熟) 병사(兵士) → 군사(軍士)
배우(俳優) → 광대(廣大) 혈맹(血盟) → 혈연(血緣)
견문(見聞) → 문견(聞見) 변사(變死) → 오사(誤死)
인연(因緣) → 연분(緣分) 화장(化粧) → 단장(丹粧)
결혼(結婚) → 혼인(婚姻) 약속(約束) → 언약(言約)
당직(堂直)/숙직(宿直) → 입직(入直) 포고(布告)/고시(告示) → 반포(頒布)
은하(銀河) → 천한(天漢)/천황(天潢) 취조(取調) → 신문(訊問)/점고(點考)
제방(堤防)/언(堰) → 방축(防築)/방천(防川)

  위에서 든 예들은 일본식 한자어가 들어오면서 예전부터 쓰이던 고유의 한자어들이 자리를 빼앗겼거나 어느 정도 자리를 내어 준 것들이다. 화살표의 왼쪽 낱말이 일본식 한자어이고 오른쪽 낱말이 본래 쓰던 한자어이다.
  이제 와서 ‘결혼, 화장, 약속, 배우’와 같은 말들을 쓰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라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버스’나 ‘텔레비전’과 같은 영어를 우리말인 줄 알면서 배우게 할 수 없듯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엄연한 일본말을 우리말인 줄 알면서 배우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