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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나는 마누라를 잘 만났다. 그는 여느 마누라들처럼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줄 아는 엄마이다. 그는 수십 권짜리 전질로 책장을 무겁게 장식해 놓기보다는 서점에 가서 한 권씩 꼼꼼히 읽어보고 사준다. 신문 하나 보기 힘든 시골에서 자란 나도 그 덕에 그림책의 환상적인 세계를 맛보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딸과 함께 동네 도서관으로 그림책 빌리러 가는 일은 영화관이나 놀이공원에 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즐겁다.
  그림책을 보지 않은 어른들은 그림책이 유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완전한 편견이다.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가 유치하지 않듯이, 그림책은 삶의 깊은 진실을 담고 있다. 그림책은 인간의 모든 주제를 간명하게 다루고 있다. 선악, 환경, 여성, 인종, 자신감, 존재감, 개인, 사회, 공존과 연대, 질투, 모순의 극복, 다름, 가난, 성장, 죽음, 환상, 인연, 자유, 사랑 ……. 그림책은 가장 쉬운 언어로, 가장 정제된 표현으로 삶의 진리를 알려준다. 뻥이 아니다. 그림책 속에 길이 있다. 그림책은 세상 이치를 몇 마디 말로 압축한 선시(禪詩)같다. 상업적 이익만을 위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하지만 그림책은 자라는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며 어른들에게도 꼭 필요하다. 나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누나 때문에 슬픔에 싸여 있을 때 딸 책꽂이에 꽂혀 있던 <누더기 외투를 입은 아이>, <나무를 심은 사람>, 몽골 민화를 바탕으로 한 <수호의 하얀 말>을 읽고 큰 위안을 얻었다. 삶과 죽음이 이어지며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 깨달았다. ‘사람한테는 사람보다 귀한 게 없는 법이지. 아빠 말 잊지 말아라’(<누더기 외투를 입은 아이>)는 대목은 하나의 잠언이 되어 가슴에 박힌다.
  다른 책들과 달리 그림책은 읽어야 진정한 그림책이 된다. 일본의 그림책 발전에 큰 공헌을 한 마쓰이 다다시(松居直)는 “어릴 때 부모가 그림책을 읽어주지 않았던 사람은 그림책을 읽은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아이 혼자서 그림과 글을 더듬는 것만으로는 감동을 주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평면적인 그림과 글이 부모의 목소리로 입체화될 때 아이들은 그림책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 그림책 읽기는 두 명의 독자를 향하고 있다. 하나는 아이를 향하고, 다른 하나는 아이 옆에 있는 어른을 향한다. 그래서 그림책은 태생적으로 이중 독자(dual audience)가 충족되어야 온전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림책은 서정이 넘치는 서사이다. 쪼개진 단편적인 정보보다는 인물들이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담은 서사(story)는 어른, 아이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며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게다가 5~10분 정도만 들이면 완벽한 이야기 하나를 알게 된다. 우리가 눈물 흘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감동적인 서사를 만났을 때이다. 2차원의 세계를 3차원의 세계로, 고정된 화면을 시공을 넘나들며 움직이는 사건으로 바꾸는 힘은 바로 아이 옆에서 들려주는 부모의 ‘목소리’에서 나온다. 마귀할멈이 되었다가, 괴물이 되었다가, 마음 좋은 할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부모가 이야기 전개에 맞게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읽으면서, 말이 막혀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가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와 함께 깔깔대며 웃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도 똑같을 수 없는 목소리는 서사의 현장감, 박진감을 보장한다.
  그림책 읽기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전면적인 언어적 상호작용이자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다. 부모의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를 통해 아이와 직접 소통하는 환상적인 체험이다. 그림책 읽기는 부모의 읽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장면에서는 자기가 읽겠다고 소리치게 되고, 아이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기도 하며, 느낌을 공유하기도 한다. 슬픔이나 감동을 주체할 수 없어 목이 멜 때에는 아이를 바짝 끌어안거나 어깨를 토닥이게 된다. 너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하늘 높이 발을 흔들며 깔깔거리게 된다. 잠자리에서 읽어줄 때 맡게 될 엄마의 머릿결 냄새, 다음 장에 무서운 괴물이 나온다며 아빠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을 때의 감촉……. 이런 것들이 하나로 버무려져서 아이의 삶과 통섭하고 부모 또한 가물가물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게 된다.
  내신, 수능, 논술을 중심으로 한 현행 입시 제도를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부른다. 교육 경쟁은 이제 대학 입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는 인생 승리를 위해 학습을 반복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열이 그저 배움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자식 잘돼라’는 지독히도 눈물겨운 바람이 ‘건강한 인격체, 성찰적 삶’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경쟁에서 승리하고 부의 축적과 지위 획득이라는 속물적 가치에 머물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는 ‘생뚱맞아 보이겠지만’ 그림책을 읽는 것이다. 그림책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텔레비전이나 게임기 앞에서 보내는 수동적인 시간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질이 높다. 여러분이 아직 부모가 아니라면 명절에 만나는 조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줘라. 여러분이 혼자라면 더더욱 여러분 자신을 위해 그림책을 펼쳐 보라. 당신의 자식이, 아니 당신 자신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란다면 그림책을 읽으라. 어릴 적 가장 특별한 사람(부모)이 ‘훈육’이 아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자신과 함께 나누었다는 경험만으로도 그는 세상에 대한 신뢰와 삶의 의욕을 잃지 않고 자랄 것이다. 그림책 읽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