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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여성」3권 5호, 1938.5.)

  백석(白石, 1912~1963)의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를 읽으면 다소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움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단순하게 문답 구조로 되어 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탓이다.”라는 문답형으로서 매번 같은 질문과 거기에 대한 알쏭달쏭한 여섯 가지의 대답이 시의 전부다. 이런 알송달송한 부르주아(bourgeois, 「명」「1」『사』중세 유럽의 도시에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하여 제삼 계급을 형성한 중산 계급의 시민. 「2」『사』근대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사람. 「3」'부자(富者)'를 속되게 이르는 말.)적인 질문과 대답이 읽는 이를 유쾌하게 한다.
  질문도 특이하지만 대답도 모범생의 그것이 아니다. 먼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라는 질문에서 ‘외면하다’의 뜻풀이는 “마주치기를 꺼리어 피하거나 얼굴을 돌림.”으로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풍긴다. 그런데 시의 흐름은 영 다른 행복한 분위기다. 시에서 말하는 이가 외면하고 길을 걸어가는 까닭은 자신이 너무나 행복하여 남을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은 상태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 하는 것은”으로 질문을 바꾸어도 대답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인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 하며 길을 걸어가는 것은 먼저 다음 세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나타난다.

  * 날씨 탓- 잠풍(잔잔하게 부는 바람) 날씨가 너무 좋은 탓
  * 동무 탓-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
  * 내 탓- 내가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

  사람들은 날씨가 흐리면 기분이 찌뿌듯하고 날씨가 화창하면 기분도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좋은 날씨는 좋은 기분의 으뜸 조건이 된다. 또한 내가 새 구두를 신으면 좋지만 내 동무가, 그것도 평소에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으스대며(?) 걸어가던 모습을 상상하면 역시 웃음이 나온다. 친구도 즐겁고 그것을 말하는 이도 즐겁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가난한 내가(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맨다는 점에서) 고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동무와 나는 가난하다는 공통점을 지니는데, 차이점은 동무는 새 구두를 신고 즐거워하고 나는 비록 헌 넥타이를 매고 다니지만 고운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누가 더 가슴 벅찬 일인가? 당연히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사람을 흥분시키고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2연에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세 가지 이유가 있다.

  * 월급 탓- 내가 직장을 다녀 경제력이 있다.
  * 콧수염 탓- 내가 젊은 나이에 코밑 수염도 길러보고 모양도 낸다.
  * 맛있는 음식 탓- 달재 생선(달강어, 몸 길이 30cm 가량으로 가늘고 길며, 머리가 모나고
     가시가 많음)을 진장(진간장)에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온다.

  2연에서도 역시 내가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직장을 다니고 월급을 타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 재미있는 점은 젊은 나이에 코밑 수염을 길러 본다는 호기심의 발동이다. 노인만이 콧수염을 기를 수 있는 게 아니라 젊은 나이에도 마음대로 코밑 수염을 길러 본다는 점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남자 아이들은 어려서 한번 쯤은 나도 나이가 들면 콧수염을 길러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고 볼 때 젊은 나이에 그것을 실천하는 일이 큰 행복일 수 있다. 즉 어린 시절에 금지되었던 일을 나이 들어서 해 본다는 점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어느 시에서나 맛 있는 음식을 생각하는데, 역시 이 시에서도 가난한 집에서는 달재 생선을 진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에서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말이 귀에 들려 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일상의 행복감은 어디 큰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조그마한 일상의 사건에서 온다는 것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말하는 이는 분명히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좋은 날씨가 행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난하지만 새 구두를 신은 동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할 것이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내가 행복하며, 코밑 수염을 기르고 늘 꼭 같은 넥타이지만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실이 행복하고, 가시가 많은 생선이지만 진장에 지진 생선은 맛도 좋다는 먹는 것에 대한 기대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