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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대학 입학 시험일에 항상 나타나는 장사꾼이 있다. 바로 수험표를 넣을 수 있는 비닐종이를 파는 분들이다. 비닐에 수험표를 넣고 안 넣고는 입시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수험표꽂이 비닐은 인생을 좌우할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불안 심리를 자극한다. 호주머니에서 꺼내 든 천 원짜리에는 수험표를 비닐에 깨끗하게 넣어 가슴에 달면 조금이라도 좋은 점수를 얻지 않을까 하는 가느다란 기대감이 담긴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것임을 잘 알면서도 작은 포장으로 약한 구석을 메우고 싶어진다. 이렇게 형식으로 빈약한 내용을 덮어보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있다. 그중에 인사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교 모 동아리 창립 30주년 기념 강연회를 들으러 간 적이 있다. 강연을 맡은 분은 외국인으로 진리를 향한 끝없는 갈망으로 한국에까지 와서 생활하는 분이다. 그동안 책을 통해 그분의 삶을 흠모하던 터라 육성을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 짬을 냈다. 그런데 나눠주는 강연 순서지를 보고는 맥이 풀렸다. ‘강연 식순’에는 강연을 하기 전에 현 회장 인사말, 역대 동아리회장단 회장 인사말, 전국 동아리 회장 인사말, 지도교수 인사말, 강당을 빌려준 직장 동아리 회장 인사말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이들 고위급 인사의 인사말을 들어야 한다. 다행히(!) 준비 부족으로 30분의 시간을 허비한 주최 측은 대표로 지도교수 인사말만 듣고, 다른 분들은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마 마이크가 제 시간에 설치되었다면 그분들의 주옥같은 인사말을 꼼짝없이 들어야 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겸양이라는 유교적 덕목은 인사말에서 보기 좋게 사라진다. 관습법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거의 모든 행사에 인사말은 빠지지 않는다. 정치 행사든 학술 행사든 개인 행사든 대규모든 소규모든 그것을 주최하는 측에서는 얼마나 ‘끗발’ 높은 분을 모시는가로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높은 양반이 오면 그 분이 도착할 때까지 기꺼이 시작을 미루고 기다린다.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높은 분을 모셨는가로 행사의 무게감을 가늠한다. 청중들의 집중력이 가장 높은 행사 초반부는 인사말로 대표되는 축사, 격려사, 환영사, 내빈 소개로 채워진다. 취지를 공유하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였을 텐데도 지금까지 들어 본 인사말은 화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갑다, 환영한다, 와 줘서 고맙다, 좋은 시간 돼라, 잘해 보자’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동지한테 ‘동지가 되자’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말이 끝나면 주최 측은 다른 분께 마이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 하거나, 아니면 미처 순서에 넣지 못한 분을 사회자의 재량(능력)으로 즉석에서 ‘한 말씀’을 청해 올리기도 한다. 가끔 보면 자신에게 마이크 잡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거나 소개조차 하지 않은 결례에 분통을 터뜨리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인사말의 과잉은 우리들의 위선을 표현한다. 본론을 있는 그대로 우직하게 시작하지 않고 비닐포장으로 행사를 치장하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위선이다. 단상에 오른 인사의 위세를 빌어 행사의 무게감을 보장받으려 한다. 인사말에 있어서 그것을 준비하는 입장이든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이든 우리는 모두 공범이다. 인사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인사말을 할 사람을 섭외하고 순서를 배치할 때 우리의 위선은 첨예화된다. 숨겨진 욕망이 공식화된다. 그런 위선은 우리 모두에게 물들어 있다.
  또한 인사말의 과잉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여전히 위계 사회임을 보여준다. 인사말을 할 사람의 ‘급’을 고려하는 것은 바로 모임을 ‘모임 자체’로 보지 않고 계층과 우열로 구분하는 우리들의 낯익은 자화상이다. 어느 정도 ‘급’이 올라와 인사말을 하는지 둘러보는 우리도 이 위선의 한 축이다. 대학에서 국제 학술 대회라도 유치하면 주최 측은 해당 학교 총장의 참석을 위해 애쓴다. 그래야 행사의 ‘위상’이 높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과 위계질서가 강하게 반영된 행사일수록 인사말을 한 사람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다. 애초부터 본 행사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높은’ 순서대로 자리를 뜬다. 눈치 빠른 주최 측은 세레모니와 본 행사를 나누어 행사에 참석한 -실은 인사말만 하러 온- 분들이 ‘합법적으로’ 자리를 뜰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러니 인사말을 한 사람들 중에서 행사 전체 일정을 꿋꿋하게 지키는 분은 할 일 없는 사람 정도로 취급된다.
  물론 모든 인사말이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성이 담긴 말은 그 자체로 큰 빛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삶을 바꾸기도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의 인사말은 앞뒤가 뒤바뀌어 있다. ‘조용필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라고 했던가. 그 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실력과 무관하게 스타 조용필을 기다리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혹시 우리의 인사말도 그런 것 아닐까? 인사말을 할 조용필만을 중시하고, 그 뒤에 나오는 사람들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빛나는 스타 조용필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의 교육 체계,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고등학교,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대학이 되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의 완결성, ‘지금, 이 순간’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어떠한 변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장소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인이 항상 회장이고, 사장이고, 전문가이고, 교수이고, 지도자인 것은 아니다. 타인은 항상 대상이고, 객체이고, 청중인 것은 아니다. 역동적으로 역할이 뒤바뀔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생이 학생이 될 수도, 주인이 손님이 될 수도, 사장이 평사원이 될 수도, 회장이 평회원이 될 수도, 권력자가 민중이 될 수도, 연사가 청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자리에 앉다가도 뒷자리에 앉기도 하고,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다가도 딱딱한 걸상에 앉기도 해야 한다. 모임에 꼭 필요한 순서만, 그래서 모임의 질이 모인 사람의 참여와 토론만으로도 충분히 보장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모임과 무관한 외부 인사를 무리하게 불러세워 매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결례를 피할 수 있다. 그럴 때 한국형 겉치레 문화의 표상인 인사말은 ‘의례적인’ 것에서 ‘감동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다.
  영화관에서 대한뉴스와 애국가 청취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 것으로 국가에 충성을 다짐할 우매한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사장에서 인사말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행사 주최 측 대표의 말을 직접 듣지 않더라도, 장소 제공자의 환영사를 듣지 않더라도, 행사의 내용만으로도 도움 주신 분들의 지향과 철학을 느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더 공감의 깊이가 있지 않을까?
  학술대회가 열리면 참석자 대부분은 관심 가는 것만 골라 듣고는, 그 외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과 ‘친교’의 시간을 보내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행사장을 빠져나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노구를 이끌고 매번 학회에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뒷자리를 지키는 어느 원로학자의 모습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본인이 그동안 해 온 연구 주제와 같은 발표를 하는 젊은 학자에게는 쉬는 시간에 조용히 다가가 “발표 잘 들었어요.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서 적었어요” 하며 빽빽하게 적은 메모지 한 장을 쑥스럽게 건네준다. 그 비효율적이고 둔해(!) 보이는 행동은 학문 자체에 대한 깊은 진정성이 있기에 감동적이다. 그런 분에게 인사말 한 마디 듣고 싶다. 그분은 국어학자 강신항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