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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경(드라마작가)

  봄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벚꽃이 한창인 때다. 거리 곳곳에 벚꽃들이 몽환적으로 피어있다. 쳐다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면서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어디론가 확 비현실적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그 아릿한 쾌감을 얼른 털고 오피스텔 계단을 오른다. 문 열고 들어서면 어제 연출자가 와서 잔뜩 뿜어내고 간 담배연기가 아직도 배어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인터넷을 켜서 음악을 틀고 커피를 뽑는다.
  그리고 나는 가을로 간다. 단풍 물들고 낙엽 뒹구는 가을로, 서리 내리는 초겨울로, 흰눈 쌓이는 한겨울로……. 그 가을과 겨울에 광화문은 어땠나, 인사동은. 평창이나 진부쯤은 또 어떨까. 그곳에서 나는 바이올린 켜는 여자였다가 집 짓는 남자도 됐다가, 스무 살도 됐다가 서른 살이 넘기도 하고, 사랑을 잃은 남자였다가 배신하고 돌아선 여자이기도 하고…….
  고만 하자. 더 이상의 제조공정은 비밀!
  계절은 봄인데, 윤중로로 진해로 봄 즐긴다고 난리인데, 골방에 처박혀 상상의 여행만 한다.
  시집도 펼쳐 보고 누렇게 바랜 옛날 메모 수첩도 뒤적여 본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 머뭇대지 말고 / 서성대지 말고 / 숨기지 말고’ 같은 시구를 만나 잠시 음미도 한다. 나의 사랑은 어떠했나, 내가 하고픈 사랑은 어떤 걸까, 그간 들었던 재미있는 사랑들은……. 나의 상상은 끝 간 데 없이 뻗어가고 부풀어 오른다.
  주인공은 나의 생각을 먹고 자란다. 나의 생각이 풍부해지면 주인공의 뼈와 살이 튼실해지고 드라마가 풍부해진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즐거워진다. 흐뭇하게 웃고 펑펑 울게 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열심히 읽고 보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쓴다. 그러다 보면 내 주인공이 꼴을 갖추고 태어나 비로소 움직인다. 저절로 입을 열어 사랑도 하고 배신도 하고 모험도 하고 제 갈 길을 간다.
  이번 내 주인공은 입을 열어 무슨 말을 해줄까. 클라이맥스에, 마지막 장면에, 사랑을 얻은 후에 혹은 사랑을 잃은 후에 무슨 말을 해줄까. 나도 아직 모른다. 그가 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린다.
  그 기다리는 일이 너무나 행복하다. 만약 주가 그래프 보는 일로 돈을 벌라고 하거나 수술용 메스를 드는 게 업이 되어야 한다면…… 난 너무 우울해질 것 같다.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읽고 열심히 보면서 내가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둔 풍부한 거리들이 주인공의 입을 열 수 있기를, 지금 기다린다. 그대, 무슨 말이든 해주기를. 그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를.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는 골방으로 간다. 그대의 한마디, 날카로운 첫 키스 같은 한마디를 듣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