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정의 우리말 이야기 
말의 뿌리를 찾아서 
이런 일을 했어요 
문화 들여다보기 
설왕설래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우리말 다듬기 
새로 생긴 말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일터에서 말하다 
교실 풍경 
국어 관련 소식 
처음으로 | 국립국어원 | 구독신청 | 수신거부 | 다른 호 보기

김문오(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우리가 글을 쓸 때에 자기의 표현 의도에만 집중하다 보면 문장의 의미는 모호한 채로 내버려 두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문예문에서는 특수한 표현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실용문에서는 가능한 한 의미가 명료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1) 유기 용제를 넣은 용기가 아닌 것을 사용 시는 반드시 뚜껑을 닫아 줄 것.
유기 용제를 넣도록 지정된 용기 외의 다른 용기를 사용할 때에는 사용 후 반드시 용기 뚜껑을 닫을 것.
‘유기 용제를 넣도록 지정된 용기가 아닌 것’(즉, 다른 용기)을 가리키는지 ‘유기 용제가 아닌 다른 용제를 넣은 용기’(즉, 메탄올이나 벤젠이 아닌 다른 용제를 넣은 용기)를 가리키는지 불분명하다. 여기에서는 ‘다른 용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수정문을 만들어 보았다.
2) [팩스 보내기 마법사]에는 자동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 팩스를 보내기 위한 정보들이 입력된다.
→ [팩스 보내기 마법사]에는 선택한 사람들에게 자동으로 팩스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이 입력된다.
‘자동으로 선택한’ 것인지 ‘자동으로 보내기 위한’ 것인지 모호하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후자의 의미로 고친 것이 위 수정문이다.
3) 또한 강압 수사 재발 방지를 위해 1947년부터 유지돼 온 무술경찰관 검찰청 파견제도 폐지된다.
→ 또한 1947년부터 유지돼 온 ‘무술경찰관 검찰청 파견제’도 강압 수사 재발 방지를 위해 폐지된다.
‘강압 수사 재발 방지를 위해’라는 부사어가 수식할 말은 상식적으로 볼 때, ‘폐지된다’여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문장 구조로는 ‘강압 수사 재발 방지를 위해’가 오히려 ‘유지돼 온’을 수식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이로 말미암아 ‘무술 경찰관 검찰청 파견제’가 마치 ‘강압 수사 재발 방지’에 효과적인 제도인 줄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다. ‘강압 수사 재발 방지를 위해’라는 부사어를 ‘페지된다’ 바로 앞에 두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4) 법원은 피후견인 또는 제777조의 규정에 의한 친족 기타 이해관계인의 청구에 의하여 피후견인의 재산상황을 조사하고 그 재산관리 기타 후견임무수행에 관하여 필요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
→ 법원은 피후견인이나 이해 관계인의 청구 또는 제777조의 규정에 의한, 피후견인의 친족의 청구에 따라 피후견인의 재산 상황을 조사하고 그 재산 관리, 기타 후견 임무 수행에 관하여 필요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
‘제777조의 규정에 의한’이라는 수식어가 ‘피후견인의 친족’만을 수식하는지, ‘이해관계인’까지도 수식하는지 모호하다. ‘민법 제777조(친족의 범위)’를 찾아 확인하면, ‘제777조의 규정에 의한’의 수식 범위가 ‘(피후견인의) 친족’까지 걸림을 알 수 있다. 법령문에서 ‘의미의 명료성’은 특히 더 강조되어야 할 요건이다. 다른 조문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해당 조문 자체로 명확한 해석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위 수정문에서 ‘규정에 의한’의 뒤에 쉼표(,)를 한 것은 바로 뒤에 오는 단어인 ‘피후견인’을 수식하지 않고 ‘친족’을 수식한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문장 의미를 명료하게 하려면 적확한 의미의 단어 선택, 수식어와 피수식어 간의 어순 정렬, 문장 구조의 검검 등이 모두 필요하다. 특히 관형어 뒤에 수식받는 명사구가 둘 이상이라든지, 부사어 뒤에 수식받는 서술어가 둘 이상이면 의미가 모호해질 소지가 크므로, 어순을 바꾼다든지 아예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는 등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