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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전임강사)

  얼마 전 내가 소속된 학부 교무실에서 ‘반쯤’ 기쁜 조치가 내려졌다. 교직원과 조교 들이 교수와 시간강사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교수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선생님’이라 부르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차별적인 이름 부르기에 작은 변화를 주려는 시도가 아름다웠다.
  호명(號名; 이름 부르기)은 주체를 재구성한다. 그래서 호명은 힘이 세고 중요하다. 이름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진다. 사람들이 만든 물질적, 사회적인 여러 관계는 호명을 통해 구현되기도 하지만, 호명이 사람과 그 사람이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재해석하기도 한다. 그 결과 이름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주체가 달리 구성된다. 원래 주체가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만, 결국 이름이 주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에서는 ‘교수님’과 ‘선생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나는 대부분의 교수님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나를 가르치신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냥 알고 지내는 분들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선생님이다. 그들이 하는 일 중 제일 중요한 일이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선생님’이란 단어는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앞서 말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다른 하나가 아주 고약하다. 대학에서 ‘선생님’은 ‘교수가 아니면서 가르치는 사람’이다. 시간강사가, 아니 시간강사‘만’ 선생님인 것이다. 학생들은 시간강사를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찾아 쓴다. 어떤 학생들은 ‘교수님’ 했다가, ‘아, 아니, 선생님’이라고 자신의 ‘실수’를 정정한다. 학생들은 교수를 부를 때 ‘교수님’이라는 단어를 찾아 쓴다. ‘선생님’ 했다가, ‘아, 아니, 교수님’이라고 자신의 ‘과오’를 정정한다. 호명의 차이는 학생의 태도도 강의와 선생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달라진다. 강의에 대한 신뢰도가 달라진다. 새벽까지 열정을 다해 강의를 준비했든, 몇 년째 같은 강의록을 우려먹든 상관없이, 가르치는 사람은 호칭의 차이로 자신의 좌표를 재확인하고 각인하고 되뇌고 되새김질하고 조각한다.
  ‘교수’와 ‘선생’의 이름 분리는 한국 대학 사회의 모순된 교육 구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조를 심화·연장한다. ‘시간강사’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 앞뒤 안 가리며 몸부림치고, 밝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다. 시간강사 딱지를 뗀 후에는 그 구조에 안주한다. 교수는 안정적이며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시간강사는 학생보다도 못나고, 불쌍하고, 결핍되어 있고, 불안정한 보따리장수일 뿐이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가르침이 아니라, 지위의 문제로 바뀐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수입)’와 ‘어디(지위)’가 중요하다.
  호명은 그저 이름 부르기로 그치지 않는다. 호명은 단순한 호출이 아니라, 사람을 재구성하는 무서운 힘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무의식을 반영할 뿐 아니라 호명 받는 사람의 삶의 조건을 바꾼다. 개인적 소명감이나 성실함과 상관없이…….
  오늘 아침 인터넷 신문에 뜬, 대학 네 곳을 뛰고 월 150만 원을 버는 ‘강사재벌’의 이야기가 혓바늘처럼 따끔거렸다. “이날 수업에서도 김 씨는 쪽지시험 점수가 잘못 나왔다는 학생의 항의를 받았다. 다른 학생은 “전공 공부로 바빠 교양과목까지 챙길 수 없으니 점수 좀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김 씨가 거부하자 학생은 뒤돌아 나가며 혼잣말로 ‘강사 주제에…….’라고 내뱉었다.”
  문득 궁금해진다. 전체 교원 중 3.4%를 차지하는 ‘기간제 교사’를 학생들은 어떻게 부르고 있을지…….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교수님’이 아니라, ‘선생님’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