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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희(연세대학교 언어정보연구원 연구교수)

  올해로 6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대학의 연구원에서 사전 만드는 일을 하는 데 보내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대학의 연구원에서 일한다고 하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하면 좀 의외라는 표정, 심지어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나라에는 국어사전이 없는지, 왜 국어사전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지 하는 질문을 퍼붓곤 한다.
  사람들은 연구원이라고 하면 으레 하얀 가운을 입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연구원을 떠올리며, 사전 만드는 것도 연구에 속하는가 하고 의아해 하고, 그 다음으로는 왜 국어사전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한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전’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니 최소한 사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사전’이란 무엇인가, 왜 사전 만드는 일을 계속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 자신도 초등학교나 중, 고등학교 때 졸업 선물로 받았던 포켓용 영어사전이나 뒤적였지 국어사전을 열심히 봤던 기억은 없다. 이것이 나만의 문제였을 리는 없을 테고 우리 사회 전반이 그러했을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교육열을 가진 나라, 대학 입시 언어영역에서 국어 시험을 봐야 하고, 또 대학에 따라 논술 시험을 봐야 하는 나라인데, 국어 공부나 논술 준비를 위해 우리의 청소년들이 즐겨 보는 국어사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바가 없다. 하긴 외국어를 배울 때만이라도 꼭 사용해야 하는 외국어 사전도 펼치게 되지 않아, 한두 단어의 간단한 한국어 대역어를 제시하는 단어장으로 대체한다니, 올바른 언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현재 진행 중인 제7차 교육 과정에 국어사전 이용하기가 초등교육 교과 과정에 들어가 있다는 것과 몇몇 대학이나 기관들에서 국어사전들을 열심히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50여만 표제어를 자랑하는 국립국어원의 『표준 국어대사전』, 그리고 연세대학교가 만든 사전들이 몇몇 예이다.
  특히 연세대학교가 1998년에 출판한 『연세 한국어사전』은 우리나라 최초로 실제 언어생활에 쓰이는 5만여 단어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추출하였다는 데 사전 편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2년에 『연세 초등국어사전』을 출판했고, 이제 2010년에 『연세 현대한국어사전』(가칭)을 출판할 예정이다.
  연세대학교의 첫 사전인 『연세 한국어사전』이 10년의 긴 세월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고, 아직도 매년 새로운 쇄를 찍을 때마다 서너 개씩 발견되는 오자들이나 실수들은 사전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한다. 사전 만드는 일이야말로 ‘힘들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고긴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한두 사람의 수재가 만들어낼 수도 없고, 서너 달이나 1,2년 안에 쉽게 끝내지지도 않는, 또 일단 만들고 나면 평생 책임져야 하는 자식 같은, ‘애물단지’인 것이다. 아들, 딸을 시집, 장가 보내놨다고 손 놓을 수 없듯이, 사전 또한 출판하면 끝이 아니라, 앞서 말한 크고 작은 실수들은 없는가, 보고 또 봐야 하고, 끊임없이 변하는 언어의 모습을 반영하기 위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도의 주기를 두고 개정판을 계속 내야 하는 것이다.
  6년이나 되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사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도 사전에 관해서 한 마디 하기가 두려운 처지지만, 적어도 이번 사전을 만들면서 드는 생각은, 이제 사전은 사전을 만드는 편찬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사전 이용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전을 왜 안 보는지 탓하기 전에 과연 사전을 보고 싶게끔 만들었는가 하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일반 언중이 즐겨 사용하던 ‘먹거리’가 국어의 정통 조어법에 어긋난다 하여 ‘먹을거리’로 인위적으로 바뀌어지고, ‘얼짱’ 같은 유행어들은 국어사전에 올라갈 만한 표제어가 아니라고 하여 골라내는 사전은 이미 있다.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담은 사전 또한 있어야 한다. 목적과 용도에 따라 규모나 내용이 서로 다른 사전들이 많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많은 사전들이 사전이용자의 입장에서, 사전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사전은 크기에 따라 대사전, 중사전, 소사전으로 나뉘고, 또 사전이 담고 있는 표제어의 내용에 따라 방언 사전, 속담 사전, 고사성어 사전, 각종 전문 분야를 다루는 전문 용어 사전 등으로 그 종류가 꽤 된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이런 사전들은 물론이고 국어사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유아용, 초등용, 중고생용, 대학생용 사전과 일반인을 위한 사전; 대사전, 중사전, 탁상용 사전, 포켓용 사전; 언어생활의 규범을 제시하는 사전, 실제 언어생활을 그대로 기술하는 사전 등등 다양한 모습의 사전들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국어사전만으로 시내 대형 서점들의 서가 한 칸이 꽉 차게 될 그 날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