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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자 ‘박(朴)’의 새김을 물어 보면 ‘바가지 박’으로부터 시작하여 심지어는 ‘박정희 박’까지도 등장할 정도로 그 대답이 다양하다. 문서편집기인 ‘글’의 ‘박(朴)’의 석음을 보면 엉뚱하게도 ‘후박나무 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朴’은 원래 ‘숫될 박’이었었다. 즉 ‘숫되다’의 의미를 가진 한자가 ‘朴’인 셈이다. ‘숫되다’란 ‘순진하고 어리숙하다, 깨끗하고 순진하다, 약삭빠르지 않고 순박하다’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그 사람은 숫배기다(숫보기다), 그 사람은 숫티가 난다’ 등에서 보는 ‘숫배기(숫보기), 숫티’ 등과 함께 일상생활에서 늘 썼던 말이었지만,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朴’의 석음인 ‘숫될 박’은 잊혀 가고, ‘숫되다’와 유사한 뜻을 가진 한자어 ‘순박하다’로 대치되어 ‘박(朴)’이 ‘순박할 박’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한자 ‘朴’의 새김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살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 석음의 변천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숟도욀 박 <신증유합 초간본(1576년)> 등걸 박 <칠장사판 유합(1664년)>
<영장사판 유합(1700년)> 숟도욀 박 <신증유합 중간본(1711년)>
등걸 박 <송광사판 유합(1730년)> 검박 박 <무신간판본 유합(19세기 중엽)>
순박 박 <중보천자(19세기)> 검박 박 <유몽천자(1903년)>
등걸 박 <언문(1909년)> 질박 <초학요선(1918년)>
슌박 <한일선작문천자(1923년)> 슌박할 박 <조선역사천자문(1928년)>

  ‘숫도욀 박’에서 ‘검박 박, 질박 박’등을 거쳐 ‘순박할 박’으로 변화한 과정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숫되다’는 16세기 문헌에 ‘숟도외다’로 나타난다. ‘숟도욀 박’의 ‘숟도욀’은 ‘숟 + 도외- + -ㄹ’로 분석되는데, ‘도외다’는 현대국어 ‘되다’의 옛날 형태다. ‘되다’는 ‘다’>외다>도의다(또는 ‘도외다’)>되다’ 등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그런데 ‘숟’은 무엇일까? ‘숟’은 후에 ‘숫’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숫’을 ‘숫놈’의 ‘숫’으로 연상하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숫되다’에 대비되는 ‘암되다’란 단어가 있기 때문이다. ‘암되다’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지만,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다. ‘남자의 성격이 여성적이고 소극적이다, 남자의 성격이 남자답지 못하고 어줍다’란 뜻을 가진 단어다. 이 ‘암되다’란 단어가 존재하니까 이 단어와 대립적인 ‘숫되다’의 ‘숫’을 ‘수+ㅅ’으로 분석해서 ‘암되다’의 ‘암’과 대립되는 ‘수’로 해석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다면 ‘숫되다’의 의미가 ‘암되다’와 대립되어야 하는데, ‘숫되다’나, ‘암되다’나 그 뜻이 유사하니 말이다. ‘암되다’가 ‘소극적이고 여성적’이라면 ‘숫되다’는 ‘남성적이고 적극적’이란 뜻을 지녀야 하는데, 오히려 ‘순진하고 어리석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숫’은 무엇일까? ‘숫’의 정체를 알기 위해 우선 ‘숫’이 ‘숫되다’의 ‘숫’과 유사한 뜻으로 사용된 어휘들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다. 그런데 ‘숫되다’는 사라져 가고 있지만 ‘숫되다’의 ‘숫’과 연관된 단어가 예상 외로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숫것 손을 대거나 변하지 아니한 본디의 순수한 것 / 숫국 숫된 사람이나 새것대로 있는 물건을 이르는 말 / 숫눈 눈이 와서 쌓인 상태 그대로의 깨끗한 눈 / 숫두리왜 너무 숫되고 어리벙벙한 짓을 잘하는 사람 / 숫백성 거짓을 모르는 순박한 백성 / 숫사람 거짓이 없고 순진하여 어수룩한 사람 / 숫색시 숫처녀 / 숫음식 만든 채 고스란히 있는 음식 / 숫제 순박하고 진실하게 / 숫처녀 남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여자 / 숫총각 여자와 성적 관계가 한 번도 없는 총각 숫티 순진하고 어수룩한 몸가짐이나 모양 / 숫보기 순진하고 어수룩한 사람 / 숫스럽다 순진하고 어수룩한 듯하다 / 숫접다 순박하고 진실하다 / 숫지다 순박하고 인정이 두텁다

  이들 어휘들은 ‘숫 + 명사’의 구조를 지니고 있든, ‘숫 + 동사’의 구조를 지니고 있든 간에 ‘숫’은 모두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리숙한’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숫되다’나 ‘숫총각, 숫처녀’의 ‘숫’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숫되다’는 16세기에 ‘숟도외다’로 나타났다. 따라서 ‘숫되다’의 초기 형태는 ‘숟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태는 문헌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숟’의 형태는 다른 어휘에서 ‘숟도외다’의 ‘숟’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고 있었다.

  숟갇나가니 믈리기가 올히열여스신 숟갇나라 <번역박통사(1517년)>

  ‘숟갇나’는 오늘날의 ‘숫처녀’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 ‘숟’은 18세기에 이미 ‘숫’으로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숫도외다’는 ‘숫되다’로 변화한다. 이후 ‘숫되다’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어서 모든 국어사전에 ‘숫되다’를 싣고 있다.

  뎌런 호걸이 엇디 도로혀 삼일 신부도곤 붓그려냐 그 숫된 양이 더욱랑홉다<후수호뎐(18세기)> 숫되다(純專) <국한회어(1895년)>

  그래도 아직 ‘숟’(또는 ‘숫’)의 정체를 파악하였다고 하기 힘들다. 이 ‘숫’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숫되다’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X되다’로 되어 있는 단어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1음절 고유어’에 ‘되다’가 통합되어 ‘사람의 심성’ 등을 표현한 어휘(특히 형용사)들이 많아서 그들의 구조를 살펴보면 ‘숫’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음절 고유어에 ‘되다’가 붙어서 사람의 심성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몇몇 찾아 보도록 한다.

  늦되다, 다되다, 덜되다, 데되다, 뒤되다, 막되다, 못되다, 새되다, 순되다, 쑥되다, 안되다, 앳되다, 얼되다, 엇되다, 올되다, 일되다, 잘되다, 좀되다, 참되다, 풋되다, 헛되다, 호되다, 흠되다

  이들 ‘X + -되다’로 구성된 어휘들에서 ‘X’는 대부분이 부사(다, 덜, 막, 못, 잘 등)이거나, 접두사(늦-, 풋-, 좀-, 참-, 헛- 등)이거나 명사(얼, 뒤, 순)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숫되다’의 ‘숫’은 그 중 어디에 해당하는 것일까? ‘숫’은 독립된 명사나 부사로 쓰인 예가 없어서 ‘숫’은 접두사로 처리하기 쉽다. 실제로 ‘숫총각, 숫처녀’의 ‘숫’은 접두사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접두사가 연결되는 어기로 ‘되다’를 설정할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
  마침 ‘숫하다’란 동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숫’을 어근으로 상정할 수 있다. ‘숫하다’는 ‘순박하고 진실하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숫되다’의 ‘숫’도 어근으로 해석해 버리면 쉽게 해결될 것이다. 어근 중에는 이러한 어근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숫스럽다’를 해석할 수 있다. ‘숫’을 접두사라고 판정하면 ‘숫(접두사) + -스럽다(접미사)’의 이상한 단어 구조를 설정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숫되다’의 ‘숫’과 동일한 형태로서 ‘숫기가 없다’에 보이는 ‘숫기’(활발하여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운)의 ‘숫’은 ‘숫되다’의 ‘숫’과는 다른 ‘숫’일 것인지, 아니면 ‘숫되다’의 ‘숫’과 같은 것인데, 그 쓰임이 반대로 되어 ‘숫기가 없다’란 용법 때문에, 다른 의미의 ‘숫’으로 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마치 ‘주책이야’와 ‘주책이 없다’의 ‘주책’이 같은 단어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