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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목월의 시 "山素描 2"에 나타난 생성력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원
갈기가 휘날렸다. 말 발굽 아래 가로눕는 이슬밭. 패랭이꽃빛으로 돈다. 무지개가 감기고 풀리고 하얗게 끓는 疾走(질주). 太古(태고)의 아침을, 創造(창조)의 숨가쁜 시간을. 출렁거리는 생명. 마악 눈을 뜬, 더운 피가 금시에 돈, 그것의 질주. 달리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고, 달리게 하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는 말굽 아래 척척 가로눕는 구름. 새로 빚은 구름 엉키고 풀리고 휘휘 도는 무지개...... / 달리는 것, 옆에서 달리는 것이 목덜미를 물고, 출렁거리는 엉덩이, 불을 뿜는 입, 生命(생명)의 鼓動(고동)을. 沸騰(비등)을. 뿜는 숨결, 끓는 拍子(박자). 발굽의 말발굽의 날개를...... / 팍 앞무릎이 고꾸라진 채 / 영영 / 山(산) 이 된. // 山(산) 위에 은은한 天蓋(천개)
(‘山·素描 2’, 『난·기타』, 1959)
  박목월(朴木月,1916〜1978)의 시 ‘山·素描 2’는 한 폭의 인상파 그림과 같은 생동적인 맛을 풍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 처음 산이 생길 때 맹목적인 우주의 힘 그 자체를 가지고 원시의 혼돈에서 솟아오르는 용솟음치는 우주의 기운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천마의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천마도(天馬圖)는 마치 경주 천마총(경주 155호분)에서 출토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그려져 있는 천마도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경주 천마도에는 붉은 색의 자작나무 껍질 위에서 하늘을 나르는 말이 갈기나 꼬리나 발굽 등 온 몸이 불의 형상으로 활활 타오르면서 구름 위를 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 있다. 박목월 시인이 경주 출신이라는 점에서 근접 가능성이 느껴진다.
  이 하늘을 나는 말의 이미지는 제왕 출현의 징표로서 태양 신화와 맥을 같이 하는데, 말은 하늘의 상징인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남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처음에는 한 마리의 천마가 미친 듯 빠른 속도로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마는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도감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태초의 우주 생성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 발굽 아래 가로눕는 이슬밭. 패랭이꽃빛으로 돈다. 무지개가 감기고 풀리고 하얗게 끓는 疾走. 太古의 아침을, 創造의 숨가쁜 시간을. 출렁거리는 생명. 마악 눈을 뜬,”에서 나타나듯이, 생명이 출렁거리면서 막 눈을 떴음을 알리는 태고의 창조 행위가 그려진다. 천마가 남근을 상징한다는 상징성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천마의 남성성은 여성적 이미지의 이슬밭을 통해서 더운 피가 돌고 막 눈을 뜬 어린 망아지를 낳는다. 천마군은 계속 달리면서 암말과의 교접을 통해 우주의 휘몰아치는 생명 창조 현상을 연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서술어를 통해 잘 나타난다.
1. 휘날리다→가로눕다→돈다→감기다→풀리다→하얗게 끓는다→생명이 출렁거리다→마악 눈 뜨다
2. 달리다→척척 가로눕다→새로 빚다→엉키다→풀리다→휘휘 돌다
3. 달리다→물다→출렁거리다→불을 뿜다→고동치다→비등(액체가 끓어오르다)→숨결을 뿜다→끓다
  이 반복적인 세 번의 생명의 잉태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이란 대명사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마악 눈을 뜬, 더운 피가 금시에 돈, 그것의 질주. 달리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고, 달리게 하는 그것으로 달리게 되는 말굽 아래 척척 가로눕는 구름”. 이 ‘그것’은 다소 모호한 의미를 띄고 있지만 앞의 문장과의 연관성을 볼 때 일차적으로는 ‘더운 피가 금시에 돈“ 혹은 ’더운 피가 금시에 돈 막 태어난 천마’를 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더운 피’로 대치하면 “더운 피의 질주, 달리는 더운 피로 달리게 되고, 달리게 하는 더운 피로 달리게 되는 말굽 아래 척척 가로눕는 구름”으로 나타나게 되어 천마들의 난장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하늘을 달리는 말들의 생생력을 통해 새로운 망아지들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면서 말발굽에 날개를 달고 맹렬히 달리는 우주 생성의 기운은 어느 순간 갑자기 정지된다. 천마의 앞무릎이 팍 고꾸라지면서 멈추는 모습으로 우주 창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림을 보여준다. 태초의 무분별했던 우주의 끓어오르는 남성성과 추진력이 산의 형태로 만들어진 내력이 이제 드러난다.
  2연의 ‘山 위에 은은한 天蓋’에서는 부처의 머리를 덮어서 비, 이슬, 먼지 따위를 막는 기능을 천개가 하듯이 산의 머리 위에는 천마의 생명력 있는 모습이 은은히 덮혀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 민속에서 말날은 양기가 성한 날, 길일이라 하여 이 날을 택해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한다. 말띠에 태어난 사람은 웅변력과 활동력이 강하며 매사에 적극적이라고 한다. 박목월의 이 시는 활동성과 생성력을 지닌 말 이미지가 기기묘묘한 산의 갖가지 형태로 이어지는 산세를 형성하여 산은 하늘과 교통하는 곳, 신성한 곳이란 이미지를 다시 느끼게 한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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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