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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목월의 시 ‘家庭(가정)’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원
  地上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 아니 玄關(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 아니 어느 詩人(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 文數(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 十九文半(십구문반). /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 그들 옆에 벗으면 / 六文三(육문삼) 코가 납작한 / 귀염둥아 귀염둥아 / 우리 막내둥아.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 얼음과 눈으로 壁(벽)을 짜올린 / 여기는 / 地上(지상). / 憐憫(연민)한 삶의 길이어. / 내 신발은 十九文半(십육문반). // 아랫목에 모인 /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 강아지 같은 것들아 / 屈辱(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 / 아니 十九文半(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 아니 地上(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存在(존재)한다. / 미소하는 / 내 얼굴을 보아라. (‘家庭(가정)’, 『晴曇(청담)』,1964)

  박목월(1916-1978)의 시 ‘家庭’은 기독교적인 맥락, 즉 천상의 낙원(에덴 동산)을 떠나 지상에서 이브와 결혼하고 노동하며 땀 흘리는 아담형의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하는 그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담을 낙원에서 추방하고 가족을 위하여 지상에서 땀 흘리고 수고하라 하셨고 이브에게는 자식을 낳는 해산의 고통을 맛보라 하셨다. 그것은 지상에 사는 아담과 이브들에게 저주이자 동시에 행복이다. 이 시에서 말하는이는 지상(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낮에는 밖에 나가 노동해야하는 고통과 저녁에 가정에 돌아와 자식을 보는 행복감을 동시에 느끼게 됨을 신발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는 가정에서 노동해야 하는 이브형 아내의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신발의 상징성은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신발이 ‘속된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속된 것’의 대표적 자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현실 사회이므로 19문 반의 아버지 신발은 현실 사회에서 성공한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와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소유를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아버지인 나의 권위가 19문반의 신발 문수로 나타나고 거기에 의지하고 복종하는 막내둥이의 신발은 6문3의 문수로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속된 사회에서의 경쟁은 눈과 얼음의 길을 걷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냉혹한 경쟁 사회에서 온갖 굴욕과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걸어가는 인생 길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냉혹한 경쟁 사회를 뜻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벽을 짜 올리면 대조적인 새로운 세계, 가정이 열린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신발을 신은 사회에서 활동해야 하는 아담형 아버지에게 신발을 벗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인 가정은 천상의 이미지에 가깝다. 속된 사회에서 신던 신발은 신성한 장소에서는 벗어야 한다. 이런 대립되는 세계를 여는 중간적인 자리로 현관과 들깐을 주목할 수 있다. 현관은 집밖과 집안을 연결하는 중간적인 자리로서 예전부터 우리 민속에서는 문지방을 신성시하여 밟지 말라는 금기와 연결된다. 집에 들어서자 나타나는 현관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이 놓여져 있다.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가면 맨발 상태의 자연적 세계가 등장한다. 귀염둥이 막내가 아버지의 얼어붙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말하는 아버지는 그들을 강아지처럼 혈연의 정으로 바라보므로 마음 속에서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속되지만 냉혹한 경쟁의 세계와 대립되는 따뜻한 가정의 대립항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신발을 신다   :   신발을 벗다
집밖   :   집안
사회적 관계   :   자연적 혈연 관계(강아지와 어미 개)
자유 이동   :   안정과 휴식
얼음과 눈의 벽   :   따뜻한 아랫목
추위와 냉혹한 현실을 의미   :   따뜻한 가족의 정을 의미
지상   :   천상

  그런데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는 아버지는 하늘의 아버지처럼 절대적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절대성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에 나타난 아버지는 지상의 인간이라는 한계를 안고 태어나므로 어쩔 수 없이 어설프게 존재하는데 그 어설픔을 감추기라도 하듯이 미소하는 갈등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지상에 태어난 아담형 아버지는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하늘의 아버지처럼 여유있게 즐기지 못하고 굴욕과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면서 그 고통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미소를 띠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통 속에서도 미소하는 이상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라고 말하는 데에서 역시 다소 권위적인 아버지의 목소리가 드러나지만 5월 ‘가정의 달’에, 아버지의 날은 비록 없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가장(家長)의 고마움을 음미해 볼 때이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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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