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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날여간 지 오래다
오리는 등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등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불으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 오리를 모다 던저벌인다
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딸어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졸으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치워 나는 山으로 가며 토끼를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 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레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白石, 「오리 망아지 토끼」,『詩集 사슴』, 鮮光印刷株式會社, 1936)

  백석(1912~1995)의 시 「오리 망아지 토끼」에 나타난 말하는 이는 자신이 원하는 일은 모두 다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졌다. 이런 어리광 섞인 동화적인 생각과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는 어린아이의 공포감과 좌절감이 동시에 드러난 작품이다. 동화 속의 어린 왕자님은 그를 곁에서 도와주는 마법적인 존재가 필요하다. 이 시에서는 말하는 이의 아버지가 그런 마법적인 존재이다. 어린아이에게 마법이란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실현시켜 주는 방법인데, 말하는 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원하는 일은 모두 해 주려고 노력하는 마법의 지팡이를 든 존재처럼 나타난다.
  어린 화자는 다른 동물들과 친구가 되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고 만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논에 오리치(야생 오리를 잡으려고 만든 그물. 오리가 잘 다니는 물가에 세워 놓은 것으로 삼베로 노끈을 해서 만든 동그란 올가미)를 놓으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서 오리를 잡으러 가기도 하고 장날에 팔러 가는 송아지를 보고 내놓으라고 아버지에게 조르기도 하고 새하러(땔나무를 장만하러) 산에 가는 아버지를 따라 토끼 새끼를 잡으러 가기도 한다. 1910년대에는 대량으로 오리나 토끼나 송아지를 기르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오리도 야생 오리를 잡아야 하고 송아지도 자연 분만이었을 것이고 토끼도 산에서 굴을 파 놓은 토끼굴에 가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말하는 이가 아직 어려서 이들 야생의 동물들을 잡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하게 된다. 오리치를 놓으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오리가 등비탈에 날아가도록 아버지는 오지 않고 아무리 울면서 불러도 아버지가 오지 않자 시악(마음 속에 공연히 생기는 심술)이 나 버린다. 어린 왕자님인 화자는 괘씸한 마법사 아버지를 벌주려고 아버지가 맡긴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등 뒤 개울물에 던져 버렸다. 여기서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가 강아지와 어미 개의 관계로 비유된다. 강아지는 원래 어미 개 뒤를 쫒아다니니까 무조건적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다.
  화자는 마법사 아버지에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 주길 원한다. 첫 번째는 오리치를 놓자마자 잡아달라거나 부르면 얼른 와 달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장날 팔려고 가는 송아지를 아버지에게 내라고 고집을 부린다. 아버지는 “매지야 오나라”라는 말로 말하는 이의 소원을 들어주려 든다. 세 번째로 나무하러 간 아버지의 지개에 실려서 산으로 가는 어린 왕자의 팔자는 참으로 편해 보인다. 그는 토끼굴의 토끼를 잡으려고 한다. 토끼 새끼는 번번히 아버지가 아니라 어린 그의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이 시에서 달아나는 토끼 새끼 때문에 서글퍼하는 어린 왕자님을 보면 누구나 안 됐다는 생각보다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 미소가 저절로 떠오르리라. 그리고 듬직한 아버지가 늘 곁에서 지켜주는 이 어린 왕자님의 처지가 부러우리라.
  이 시에서 말하는 이의 위치는 왕자님과 같은 대우를 받았지만 동물을 갖기 원하는 세 가지 일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에서 동화와는 다른 면모가 보인다. 그래도 엉뚱한 일을 고집 부리고 그것을 받아 줄 아버지가 있던 시절이라는 점에서 말하는 이의 어린 시절은 동화 속의 아름다운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짜증을 부리거나 징징거릴 사람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법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의존심 없이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어른의 눈으로 보면 이 시 속의 어린아이는 궁전 속의 왕자님이기만 하다.
  어린아이의 공포심에 대해서 잠깐 생각하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아버지나 어머니 같은 마법적인 존재가 꼭 필요하다. 악한 존재는 벌하고 착한 존재는 상을 주는 권선징악의 징벌자가 필요한 것이다. 동화 속의 마법적 존재가 죄를 진 존재를 잔인하게 죽여도 아이들은 불쌍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회 정의가 이루어지고 착하게 살아갈 힘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어른의 세계는 늘 곁에서 지켜주는 마법적 존재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외롭게 선악의 구분을 할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으므로 이런 시를 읽으면 어린 시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던 때로 다시 돌아가 위안을 받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