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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윤(인천 경인여자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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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이 나의 적이로군요. 당신이 몬테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몬테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손도 아니고 발도 아니며 팔도 아니고 얼굴도 아니고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의 일부분도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다른 이름이 되세요. 이름 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장미를 부를 때, 장미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 것을.”
서늘하게 아름다운 대사를 말하는 줄리엣은 향기 진한 사랑의 언어로 이름의 허망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두 사람이 원하지 않았던 두 가문의 ‘이름’을 버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대화의 시작이며, ‘의미 있는’ 관계의 시작일 것입니다. 대개 선생님과 아이들과의 첫 만남은 출석부에 적혀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불러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팽팽한 긴장감으로 시작되는 첫 수업에서 아이들의 숨소리까지 적을 수 있을 것 같던 고요는 얼마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어쩌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건 아이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업 진도에 쫓기지 않을 때도, 학생들의 수업 분위기를 잡아야한다는 묘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뒷전에 밀려납니다. 학기가 진행되면서 비어있는 자리를 파악하고, 담임선생님이 출석부에 기록해 두신 아이들의 부재 사유만을 슬쩍 확인한 채, 수업으로 곧장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몇 해 전, 한 반의 정원이 40명 정도였을 때 이야기입니다. 인천 도심을 살짝 비껴있는 우리 학교는 아름다운 교정과 넓은 운동장과 규모 있는 강당을 지닌 덕분에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비롯한 프로그램 녹화를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학교를 찾아 온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은 선생님이 수업에 들어가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코너로 진행되었습니다. 주위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그 당시 담임을 맡고 있지 않았던 제가 젊은 선생님이라는 근사한 이유를 덧붙여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장난스레 이야기해 보곤 했던 ‘방송 출연’을 이루었다는 기쁨도 잠시, 삼 학년에 걸쳐 다섯 학급의 수업을 맡고 있던 저는 그날 이후로 수업반의 출석부를 교사용 지도서처럼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궁색한 변명이겠지만, 출석부에 있는 사진은 참 낯설었습니다. 지나친 편집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도 있고, 중학교 때 교복 사진을 순진하게 붙여 놓은 옛날 사진도 많아서 지금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겹쳐서 보기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가 교실에 있었던가 하는 이상한 발견이 이어지고 보니 평소 눈맞춤 수업을 하지 못했던 제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고 방송에 맞추어 아이들과 연습을 한다는 것도 우스워서, 불안한 마음을 태연함으로 가장하여 눈어림으로 줄긋기를 하곤 했습니다.
녹화 당일, 강당에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교를 찾아온 방송팀은 저를 출연하는 선생님으로 소개받고는, 함께 들어가 이름을 불러 줄 반을 추첨함에서 고르게 했습니다. 뽑힌 반은 수업 분위기가 나쁘지 않고 명랑했던 일학년 학급이었는데, 나름대로 그 반에 대한 공부가 되었다고 믿었던 저는 내심 기뻐하는 마음으로 방송 녹화에 참여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진행자가 곁에 서고 어깨에 카메라를 둘러 멘 촬영기사와 조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함께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저희들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프로그램 형식에 맞추어 아이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함께 찾아가 이름을 불러주고, 그 아이에 대해 생각나는 것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순조롭게 진행되던 촬영이 막바지에 들어설 때쯤이었습니다. 저는 쑥스러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아이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순간 안타까운 아이의 눈빛이 서운함에 젖어 들고 있었고, 저는 첫사랑의 고백을 들을 때처럼 얼굴이 새빨개져버렸습니다. 결국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고 진행자가 안타까움을 표현하며 녹화를 끝내자, 아이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학기 말 아이들의 평가란에 그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여러 줄 써 줄 수 있었던 저였지만, 함께 수업을 하는 아이의 이름 세 글자를 마음 속에 새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이름을 명확하게 불러주는 경우는 평소 인상적으로 떠들썩하게 자신을 드러내었거나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해 책상만 바라보고 있는 잠순이들이었습니다. 한때 아이들을 ‘소녀야’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이야기나, 아이들에게 별명을 붙여주시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웃으며 듣곤 했지만, 책 속에 나와 있는 까만 글자들만 바라보았을 뿐, 아이들의 얼굴과 아름다운 이름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깊은 반성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난감한 경우가 많습니다. 졸업생을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도, ‘반가움의 눈빛’만을 만들어 냈지, 혀와 입술로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고,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교실 안의 아이들에게는 ‘거기, 조용히 하자’처럼 고유명사 대신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예전처럼 얼굴이 화끈거려집니다.
ㅁ은 마음. 선생님은 내가 좀 수줍어 하면서 "마음이요"라고 대답했을 때 좀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동구야. 눈에 보이는 물건이 좋아. 마음 같은 건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에 생각이 잘 안 날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바꾸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왜 눈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내 마음은 박 선생님과 똑같이 생긴, 눈에 보이는 '물건'이었다.
장편 성장 소설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희미할 즈음에 읽었던 심윤경 씨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동생 영주의 영민함에 밀려 난독증에 걸린 동구의 이야기를 가족들은 별다른 대책 없이 묻어두려 합니다. 동구의 착한 마음을 읽은 선생님은 동구에게 매일 글씨 공부를 가르치시고, 동구는 세상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말하는 선생님의 후련한 모습에 천사와 연인의 모습을 겹쳐가며 사랑을 느낍니다. 말을 더듬는 듯한 소설 제목의 말줄임표가 실은 글을 배우며 세상을 읽으려는 동구의 애타는 마음이 겹쳐진 것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만, 마음을 보는 주인공의 따뜻한 마음이 더 예쁘게 보입니다. 아이들보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자부하는 국어 선생님이지만, 아이들의 마음과 이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저야말로 난독증은 아닐런지요.
이제 저는 아이들에게 화가 났을 때, 성을 붙여서 또박또박 불러주는 것보다는 오래된 사이처럼 성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부드럽게 불러주는 걸 아이들이 편안해 한다는 것 하나 정도는 알았습니다. 아직도 서툴러서 더듬거리고 있지만 ‘나……의 아름다운…… 학생들’의 아름다운 이름을 또박또박 분명하게 읽어줄 수 있는 날을 위해 오늘도 그들의 이름이 가득한 출석부를 챙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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