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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호(진안 용담초등학교)
   세상을 살다보면 우연히 어떻게 내가 이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또는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맡겨버린 채 그냥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어~어?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지?’하고 생각해보다 허탈한 웃음을 짓곤 한다.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도 그러했다. 그러니까 지난 2005년 3월의 일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중창단을 맡게 되었는데 초․중 통합학교라 가르치는 것은 중학교 음악 선생이 했지만 처음에는 왠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다 싶기도 하고,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상상을 해보니 그도 괜찮은 듯했다. 또 14명 중창단원 중에 내가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이들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는 재미도 있겠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왠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음악실에 모여 아침, 점심으로 노래를 부르고 열심히 연습하는가 싶더니 정말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창단하고 두 달 만에 경험 삼아 처음 나간 전국 동요대회(그것도 무려 120여 개 팀이 참가한)에서 인기상을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운이었겠지.’ 싶었는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몇 달 후에 열린 전라북도 어린이 대음악제 은상을 비롯해 여러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다. 물론 학생들이 많은 도시 학교에서야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겠지만 전교생이 26명인 산골학교에서는 그야말로 큰 사건 중에 사건이었다. 차츰 중창단 실력과 어려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중학교 음악 선생과 나도 점점 바빠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연주를 다녀야 하는 횟수도 부쩍 늘고 많은 시간을 중창단에 할애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그 덕인지 지난해에는 전자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과 두 차례 공연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전주와 오산에서 두 차례 공연을 했는데 3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와서 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유진 박과 맺어진 인연으로 지난해 6월에는 3집 앨범에 참여해 ‘무지개바람’이란 곡을 부르기도 했고, 앨범 참여가 계기가 되어 여러 방송과 신문에 중창단 사연이 소개되면서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더불어 여러 곳에서 초청 연주를 하고 싶다는 뜻도 알려왔다. 그중에 이탈리아에서 중학교 음악 선생과 친분이 있는 성악가 소개로 로마 한인회에서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왔다. ‘이탈리아 로마라…….’ 비행기 한 번 타보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이고 보면 로마에 간다는 것은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경비를 초청하는 쪽에서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비와 머무는 값 약간 정도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우선은 엄청난 경비를 어떻게 모을지가 문제였다. 그래도 한 번 해보자는 쪽으로 뜻이 모아졌고 주변에 아는 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중창단 아이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중창단도 아니고 아무나 덥석 후원해줄 리도 만무했다.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싶었다. 그래도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고 마음을 모으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음악 선생이 여러 곳을 찾아다닌 끝에 **은행에서 2000만원을 후원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방학 내내 초청 연주를 다니면서 여러 병원과 교회에서 수백만 원을 도와주시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꿈만 같았던 일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학부모들도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경비를 모으고 모아서 드디어 모든 경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야 우리말 대학원 다닌다고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중학교 음악 선생은 방학 내내 경비를 모으느라 참 많은 고생을 했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으로 이루어진 연주다 보니 일정도 원래 계획했던 일정보다 많이 미루어지게 되었다. 1월 중순에 출발해서 약 10일 정도 다녀오는 것으로 계획했으나 경비 모으는 것의 어려움으로 2월 24일에야 출발할 수 있게 되었고 기간도 일주일로 줄어들게 되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새벽, 학교 앞에는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지역 어르신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배웅해주셨다. 가기 전날까지도 반신반의했던 나였지만 막상 차에 오르는 순간 ‘아! 이제 드디어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도 어찌나 새롭던지…….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시작되었고 성당에서 한 차례 본공연과 여섯 차례의 길거리 공연(트레비 분수 앞, 스페인 광장,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폼페이 유적지 따위)을 하였다. 한복을 차려입고 수백 명의 관광객들 앞에서 자신에 찬 모습으로 공연하던 자랑스런 아이들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고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함께한 이탈리아 역사의 현장들-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의 고향이기도 한 피렌체와 한때 바다 무역을 주름잡던 베네치아, 추억의 항구 산타루치아, 교황이 머무르고 계시는 바티칸 성당과 로마의 유적들(진실의 입,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 따위), 화려한 문명과 문화를 누리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인해 한숨에 재가 된 폼페이 유적 따위-은 아이들이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자신의 깊이를 발견하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여행이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그 끝에서 자신을 만난다.”는 그 말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지.
   나에겐 습관이 하나 있다. 엄청난 습관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속으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 씨가 되듯이 생각이 현실로 내 눈앞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너무도 신기하게 몇 번을 그렇게 이루고 보니 나도 이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엄청난 상상이나 거창하고 허무맹랑한 꿈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현실에서 지극히 필요하고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품고 산다.
   요즘도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긴 채 그렇게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