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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태국 부라파대학 한국어학과 교수)

  “다음 주 월요일에 시험을 볼 거니까, 공부 열심히 하세요.”

  개강한 지 3주 만에 시험을 본다니 다들 한숨을 내쉰다. 그와 동시에 학생들의 얼굴에는 어떻게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는 표정이 나타난다. 그도 그럴 것이 2학년이 되어서 처음으로 한국인 선생님으로부터 시험을 보게 되니, 그들 나름대로 궁금한 것들이 많으리라. 학생들은 할 수 있는 모든 한국어를 동원해 질문 공세를 편다. 궁금해하는 것들에 차근히 답을 해 주고, 다시 한번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를 한다. 학생들은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교실을 떠난다.
  이런 분위기를 느낄 때면 교실을 나가는 학생들 뒤로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나도 너희처럼 기대 반, 두려움 반이야.’하고 말이다. 학생들은 수업시간 내내 한국어 듣기를 힘들어 했다. 그래서 몇 번씩 한국말을 반복해 이야기해 주었다. 나로서는 그런 학생들에게 ‘잘 알아 들었겠지?’ 하는 기대감과 혹시나 ‘시험 점수가 너무 낮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싸이게 된다. 그러니 ‘기대 반, 두려움 반’이란 말은 나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된다.
  3개월의 지나긴 방학이 끝난 후, 돌아오는 새 학기는 늘 정신이 없다. 3개월 동안 강의를 해 보지 않아서 학생들 앞에 서는 것도 나로서는 좀 어색함을 느낀다. 게다가 교재 없는 교과목의 수업 준비와 이런저런 일로 늘 바쁘다. 그러다 보면, 학기가 시작한 몇 주 동안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린다. 시험 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1주일은 긴 시간은 아니리라.
  A4 4장 분량의 시험지를 나누어준다. 학생들이 시험지를 보고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교실 맨 앞에 서서 학생들을 쭉 둘러본다. 그러고 나서 학생들이 이름을 썼는지 확인하며 교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10분도 못 되어 시계를 보게 된다. 사실 시험 감독이란 게 참 재미없는 일이다. 그냥 교실 안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며 시간을 죽이는 일이 전부기 때문이다.
  생각이 이쯤 미칠 때면, 뭐라도 관심거리를 만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시험을 보고 있는 학생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그들 나름대로 시험에 취해 있어서인지 다들 ‘한 표정’들 한다. 양반다리로 의자에 앉아 시험을 보는 아이, 한 발은 양반다리처럼 꼬고 다른 발은 세워 마치 한국의 아낙네들이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취하고 있는 아이, 모르는 문제의 답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며 교실 천장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범생 같은 아이, 작은 향수병 같은 약품(야돔: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약품)을 코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정신을 가다듬는 아이 등등 시험을 보는 학생들의 표정과 몸짓은 정말 천차만별이다.
  태국 대학생들도 한국의 대학생들처럼 이른바 ‘컨닝’이라는 것을 한다. 옆 친구의 답안지를 몰래 보기도 하고, ‘컨닝 페이퍼’를 만들어 필통 속에 넣거나 시험지 아래에 몰래 넣어 놓기도 한다. 물론 학생들은 시험을 봐야 하고 선생은 시험을 감독하는 입장에 처해 있으니, 나도 당연히 눈에 힘을 주고 시험 시간 내내 이곳저곳을 주시한다. 그러나 ‘컨닝’하는 학생을 잡아 시험지를 빼앗고 벌을 주는 것이 시험의 전부가 아니듯, 나도 ‘시험’과 ‘컨닝’이라는 단어에 모든 의미를 다 부여하지는 않는다.
  시험 시작 30분이 넘어가면 학생들의 표정도 싱거워지고 또다시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눈은 학생들이 작성한 답안지로 간다. 시험 감독 일이 지루하기도 하지만, 답안지에 채워진 학생들의 답이 난 무척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답안지를 살피다 보면, 주로 올바른 답을 보게 되지만, 아주 재미난 답을 보기도 한다.
  한 학생은 ‘오늘 저녁에 뭐 해요?(영화)’라는 질문에 ‘오늘 저년에 영화를 봐요’라고 적어 놓았다. ‘저녁’과 ‘저년’의 그 엄청난 차이를 학생은 모르는지 싶다. ‘아픕니다. 어디로 갑니까?’라는 질문에는 ‘대학교로 갑니다.’라는 답한 학생도 보였다. 아프면 대학교 기숙사에 가서 쉬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단어를 묻는 문항에서는 쌀국수의 그림 밑에 ‘라면, 냉면, 비빔밥, 그릇’ 등 참으로 다양한 답이 나왔다. 그림이 좀 흐려서 ‘냉면’이나 ‘라면’ 정도까지는 이해하겠으나, ‘비빔밥, 그릇’이란 답은 좀 심하지 않나 싶다. 사무실의 모습을 찍은 사진 밑에는 사무실에 컴퓨터가 있다는 이유 하나로 ‘컴퓨터실’이라고 쓴 학생도 몇 명 보였다.
  보는 나로서는 그저 재미있는 정답 혹은 잘못된 답에 불과하겠지만, 구두를 ‘센드발’, 코끼리를 ‘꼬리’, 병원을 ‘비영원’으로 쓰기까지에는 학생들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더하여 쓴 정답이리라. 그리 생각하면 학생들을 머리 아프게 만든 장본인인 내가 오히려 미안해지기도 한다.
  전공 2학년. 아니, ‘아직은 2학년’이란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지금은 이것도 어설프고 저것도 어설프지만, 3학년에 오르고, 4학년에 올라 졸업을 할 때쯤이면, 웬만큼의 한국어는 구사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꿈을 찾아 한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 한국이, 한국 드라마가, 한국 가수가 좋아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 이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들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고 싶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이 얼마나 정 많은 사람인지, 한국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말이다. 그 원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