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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다듬기
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2000년부터 국립국어원에서는 국민의 국어사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국어문화학교’를 의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7년간 만여 명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나도 인연이 닿아 ‘국어생활의 쟁점’이라는 제목의 꼭지를 맡아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 강의의 주된 내용은 ‘국어에도 질문을 던져 보자’, ‘국어에 대한 상식에 의심을 품어 보자’, 그리고 ‘솔직해지자’는 것이다.
   에밀 샤르티에라는 철학자는 ‘당신이 단 하나만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국어에 대해 어떠한 질문을 던져 왔던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으로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음이 분명하다. 단 하나의 질문만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국어에 질문을 던지는 때가 언제이고 무엇을 궁금해 했는지 떠올려 보라! “어떤 말이 맞아?”, “제대로 띄어 쓴 거야?”, “어떤 게 표준어야?”하는 질문이 대부분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국어학을 전공한 나의 효용가치도 오직 ‘맞춤법’에 있다. 어문규범 말고는 아무런 질문거리가 없다. 국어학자들은 고립되고 일반 시민들은 규범에 기죽어 있다. 모든 법이 그렇듯이, 어문규범은 다면적 성격의 언어 현실을 ‘맞냐, 틀리냐’의 문제로 바꾼다. 언어는 본질적으로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닌데도, 그동안 우리가 국어에 대해 ‘맞냐, 틀리냐’라는 단 하나만의 질문에만 머무르다 보니 다른 질문, 다른 상상, 다른 세계를 엿볼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도정일 교수는 <질문의 힘>이라는 글에서 “질문하는 법은 고장 난 똥차 고치는 법, 피시 프로그램 까는 법, 감자 수제비 뜨는 법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어떻게’에 매달리는 방법지(方法知; know-how)의 기술이기보다는, 묻는 행위 그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적 습관에 더 가깝다”고 했다. 우리는 질문하기를 정신의 습관으로 길러오지 않았다. 남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방법에만 익숙해 있다. 그 답도 근거를 구축하고 확장하기보다는 자기의 경험과 편견에 바탕을 둔 판단과 결정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던져 온 국어에 대한 질문은 기껏해야 ‘어떻게’에 매달린 기술적 질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은 어떠한가? 한자는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지, 한자를 배우는 것과 한자를 글에 사용하는 것이 같은 차원인지, 반대로 한글전용으로 우리의 문자생활은 온전해질 수 있는지, 표준어만으로 언어생활이 가능한지, 사투리는 우리에게 이제 무엇인지, 맞춤법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어떠한 물질적·정신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맞춤법이 없던 시대에는 문자생활이 엉망이었는지(즉, 소통이 불가능했는지), 누리꾼들이 국어를 파괴한 문제아들인지, 그들은 뭘 파괴하고 있는 것인지, 누리꾼들처럼 국어를 소리 나는 대로만 쓰면 정말 국어는 만신창이가 되고 마는 것인지, 국어가 외국어 때문에 오염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언어는 ‘오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어떤 게 ‘오염된 말’이고 어떤 게 ‘순수한 말’인지, 우리말을 갈고 다듬자고 하는데 갈고 다듬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언어순화는 실현 가능한지, 영어에 대한 끝없는 욕망의 근원은 무엇인지, 실제로는 이중 언어(한국어와 영어) 생활을 지향하면서도 영어 공용화나 영어 마을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완고하게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주노동자나 탈북자들의 한국어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언어는 현실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언어와 현실 중에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국어 능력 향상의 요체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이런 건 어떤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있는 이동국이 이어지는 자신의 불운을 막고자 ‘東國’이라는 한자 이름을 ‘同國’이라고 바꾸었다는데 정말 이름이 안 좋아 골이 안 터진 것인지, ‘말이 씨가 된다’는데 정말 그런지, 요즘 뜨는 연예인들은 다 예명을 쓰는데 예명의 효과는 어떠한지, 2007 남북정상회담에서 대통령이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거나 ‘인민은 위대하다’는 글귀를 남겼을 때 ‘인민’과 ‘국민’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차이를 느끼는지, 신군부가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국명까지 바꿔버린 국가를 ‘미얀마’로 불러야 할지 ‘버마’로 불러야 할지,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태양계 행성 중에서 막내 별 ‘명왕성’이 행성의 자격을 박탈당했다는데 이름이 상실된 명왕성에 대해 우린 어떤 생각이 드는지, 같은 시기에 조성된 아파트 단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민영 아파트 거주자들이 민영과 임대를 구별하기 위해 자기들끼리 서명을 받아 이름을 바꿔버렸다면 이름은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인지, 경남 합천에서 공원 하나를 놓고 ‘새천년 생명의 숲’이냐 ‘일해공원’이냐로 벌어지는 이름 전쟁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래서 결국 언어가 우리에게 어떤 효과를, 어떤 힘을,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를 따져봄 직하지 않은가.
   언어는 사회적 사고의 총아이다. 그래서 우리가 언어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지하게 사유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답은 없다. 답이 없음을, 그리고 답이 여러 개가 존재할 수도 있음을 인정할 때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공존이 가능한 것이다. 답을 갖지 않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참 긴장되는 일이다. 자신의 본바탕과 깊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대화는 그렇게 팽팽한 긴장을 동반한다. 그래도 그 길을 가야 한다.
   우리는 언어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다. 공적 영역에서 국어는 항상 지키고 다듬어야 할 애국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서 국어는 항상 무관심과 소외의 대상이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 것이다. 두 영역 간의 간극은 언어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나았다. 예를 들어 사적 영역에서는 영어를 완전 정복하여 원어민 화자와 ‘프리토킹’하려고 한다. 하다못해 나는 못 그러더라도 우리 자식만큼은 ‘이중 언어 생활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국어를 사랑하자고 말한다. 정말 이중적이다. 차라리 우리의 영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무엇인지를 찾자고 하는 게 더 솔직해 보인다. 나라 전체를 영어 공용화라는 세례를 받게 할 것인지, 동네마다 영어 마을을 건설할 것인지, 빈터만 있으면 잉글리시 존을 건설할 것인지, 미국 백인 원어민 교사 채용 수를 확대할 것인지, 아니면 교육 방법과 체계의 혁신에 길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지금처럼 오직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사교육 시장에서 해결하라고 내맡겨 놓는 것은 무책임하다. 한자 없이도 문자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는 한자가 필요하므로 한자 공부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사투리가 구수하고 정감 어리다고 말하면서도, 서울말 표준어를 열망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언어에 대해 솔직히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으면 영어에 의한 언어 차별, 표준어에 의한 언어 차별, 한자에 의한 언어 차별, 어문규범에 의한 언어 차별은 극복되기 어렵다.
   이러한 다양한 질문이 가능하려면 질문의 주인공이 국어학자에서 시민으로 바뀌어야 한다. 휴게실이나 회식 자리 열 번 중 한 번 정도는 국어를 문제시하는 얘기를 나눔으로써, 그래서 ‘웰빙’과 ‘참살이’의 사이에서, ‘사라다’와 ‘샐러드’ 사이에서, ‘펑크’와 ‘구멍’과 ‘빵꾸’ 사이에서, ‘매우’와 ‘억수로’와 ‘허벌나게’ 사이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우리들의 언어생활을 솔직 담백하게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국어, 지금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지금 우리가 은밀하게 욕망하는 언어에 대해, 당위와 한탄이 아니라 현실에 주목하면서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럴 때 다양한 개인이 공존하는 공동체로서의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새로운 성찰과 소통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글날 의례적으로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외치기에는 우리가 던지고 해결해 가야 할 질문이 너무 많다. 우리의 언어 현실을 우리 모두의 의제로 삼고 질문을 주고받을 때 기억에서 사라진 한글날이 복권될 것이다. 그게 되살아난 국경일인 한글날에 드는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