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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이천 장호공업고등학교)
   2년 2개월의 군 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입대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그날’이라고 말하겠다. 그때의 내 심정은 딱 이런 상태였다.
   ‘세상에, 지금까지 겪은 일을 한 번 더 해야 한단 말이야!’
   그 막막한 심정,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나는 이년 차 교사다.

   “어머니 친구 아들은 다 잘나간다.”는 시쳇말처럼, 남들은 쉽게만 가는 길을 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왔다. 대학도 남보다 오래 다녔고 사회생활도 했다. 대학원도 거쳤고 행정조교도 했다. 그 길 끝에서 만난 우리 학교는 경기도의 동남쪽 모서리, 시골에 있는 실업계 사립학교이다. 친구들은 나의 합격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서울 생활에 길들여진 네가 답답한 시골 생활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 “막 나가는 아이들을 다루려면 고생 좀 하겠다”면서 걱정을 해주었다.
   그러나 의외로 ‘시골 생활’은 나에게 특별한 어려움을 주지 않았다. 다만 ‘실업계’ 학교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이 계속 나를 괴롭게 했다. 아이들은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열의가 없었다.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으면서도 자기중심적이다. 내일의 일을 스스로 계획하며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없고, 당장의 감정만이 그들을 지배한다. 그래서 수업시간은 늘 ‘밀고 당기기’ 한판이다. “나는 싫다.”, “졸리다.”, “지금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아이들을 첫해는 어르고 달래면서 겨우 보냈다. 먹을 것도 좀 던져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나는 ‘첫해에는 절대로 매를 들지 않겠다.’는 ‘용감무쌍’한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아이들은 한 학기도 가기 전에 나를 파악했다. 감언이설과 으름장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10월의 어느 날, 나는 회초리를 들고 말았다. 모든 폭력이 그러하듯 처음의 놀라움과 떨림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치 생활처럼 익숙해지고 만다. 하루가 지나면 어제 먹고 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없듯이, 이미 행해진 폭언과 폭행을 나는 잊는다. 어쩌면 잊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내 손에 쥐어진 회초리를 본다. 교육학을 공부한 알량한 자존심으로 나는 직접 회초리를 준비하지 않고 다른 선생님께 빌려오는 형식을 취했다. 30cm 남짓의 가늘고 얇은 대나무 막대. 나는 그걸로 손바닥이나 발바닥 혹은 종아리를 후려친다. 그렇다고 체벌이 늘 의도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예전의 아이들이 아니다.”고 말하는 선배교사의 이야기를 예전의 아이인 내가 듣는다. 예전의 나는 예전의 교사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더라?

   지금껏 수업시간의 절반은 졸았고 절반은 훼방을 놓았던 K는, 그날은 졸기를 선택했다. 잠을 깨울 요량으로 책읽기를 시켰더니 읽기 싫단다. 수업에 참여하기 싫으면 복도로 나가라고 했더니, 상소리를 하며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수업이 끝나기 전에 과제 검사를 하려고 들어오라고 했지만 역시 과제는 하지 않았다. 약속대로 발바닥을 때리려고 하자 또 상소리를 한다. 순간 기분이 팍 상한 나는 과제를 해오지 않은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대로 둔 채 한참 창밖을 내다보다가 종이 친 뒤 교실을 나왔다. 그 뒤에 문제가 생겼다. K가 쉬는 시간에 울면서 집으로 갔다는 것이다. K의 담임선생님은 K의 아버지가 지금 학교로 오고 있다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고, 이런 일을 처음 당해보는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간 K의 여러 행적을 담임 선생님이 잘 정리해 둔 덕일까 더 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틀 후 등굣길에 교문에서 만난 K는 나에게 “그저께 일은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먼산을 보며 “알았다.”고만 말했다. 그만큼 나의 정신적 충격은 컸다. 나는 안다. K가 다른 선생님에게 어떻게 체벌을 받는지 말이다. 그런데 울면서 집에 가서 말하는 사연의 주인공이 왜 나란 말인가. 나는 억울했다. 몇몇 아이들에게 “샘님은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 같아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말이 칭찬이라고 굳게 믿어왔다. 내가 어렵게 돌고 돌아서 이 길에 들어선 이유도 그런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내 회초리를 본다. K에게, 아니 모든 우리 아이들에게 나의 회초리는 세상의 모든 폭력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것이 ‘교육 목적’이라는 그럴싸한 외투를 입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때론 체벌이 스승과 제자 사이를 좀 더 돈독하게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결과가 나왔을 때만 통하는 말이다. 나의 체벌은 과연 아이들의 긍정적인 행동 변화에 이바지하고 있는가? 내 회초리에는 ‘사랑의 회초리’라고 씌어 있다.

   대학시절 나는 “너는 왜 그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냐?”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남의 단점도 좋은 쪽으로 이해하고 아름다운 것만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람도 있지만,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과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대한민국 교사로 일 년의 시간을 보낸 뒤, 똑같지 않은 아이들을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혹은 똑같은 아이들을 똑같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 년째 살고 있다. 문제는 바깥에 있지 않다. 문제 상황만을 탓하거나 말썽쟁이들의 핑계만 대려면 끝이 없다. 나는 알고 있다. 문제의 고갱이와 해결의 실마리가 내 안에 서리어 있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