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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가끔씩 남이 하는 말이 내 생각과 하나도 빠짐없이 같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괜히 내 말인 척하며 반복하기보다는 남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번 호에는 남의 이야기 세 개를 들려주는 것으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대신하려고 한다.

  (1) 한학성 교수가 쓴 “우리 시대 영어담론”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으니 들어보라. 그는 7차 교육과정 개편으로 예상되는 제2외국어 및 실업계 과목 등의 과원 교사(필요한 인원 이상으로 남아도는 교사)들을 단기간 연수(대학의 21학점에 해당하는 315시간 이상의 수업을 받으면 됨)만 받으면 새로운 교사자격증을 주는 부전공 영어 교사 연수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그 발상의 무모성도 문제려니와, 영어 교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기본적 영어 능력마저 점검하지 않은 채 연수생을 선발하는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 고등학교 1학년용 영어 교과서 제1과에 나오는 글을 사용해 쪽지 시험을 치렀다. ‘그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를 영작하라고 했더니 시험에 응시한 38명 중 ‘팔’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arm’을 제대로 쓰지 못한 사람이 6명(16%), ‘잡아당기다’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ull’을 제대로 쓰지 못한 사람이 10명(26%)이나 되었다. 그 외에도 ‘He 잡아당겼다 my 팔을. / He my arms pull. / He pull down my army’라는 답이 나왔다. ‘Tom starts to fall asleep(탐은 잠들기 시작한다)’를 번역하라고 했더니 ‘톰은 가을에 시작한다’고 한 답도 있었다. 놀라운 것은 예시된 것과 같은 엉터리 답을 쓴 사람 전원이 연수에 통과해 모두 영어 교사 자격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학성, “우리 시대 영어담론”, 19~23쪽에서)

  (2) 귀화 한국인인 박노자 교수는 198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일본의 삼류 문화의 침투를 ‘문화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비판하던 진보파들도 한류의 아시아 ‘정복’을 이야기하고 신자유주의와 국가주의가 뒤섞인 어투로 “세계 속으로 뻗쳐가는 한국 문화 위력”에 대해 찬양가를 부른다며 비판한다. 그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중국·베트남 언론들이 한국의 1980년대를 방불케 하는 어법으로 한류의 아류 제국주의적 본질 등을 거론하면 한국 언론에서는 ‘역풍’이라며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을 잘 표현하는 한류 상품들이 과연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악화 일변도의 고용불안, 약자에 대한 살인적 착취·배제 등의 한국적 신자유주의의 가장 절실한 문제인 이면들도 보여주는가? 나아가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수많은 한국인들의 피땀 어린 활동들을 약간이라도 담아주는가? 사실 한국 드라마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방송에서 상영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내용에 ‘정치·사상적으로 불온한’ 요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국의 대중을 신자유주의적으로 수탈하고 있는 옛 공산권 국가의 지도층의 입장에서는 한국 드라마들의 분위기는 대중들의 신자유주의적 순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와 문화적으로 잘 소통되는 것이 21세기의 주요 화두 중의 하나이겠지만 우리가 과연 아시아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미국의 대중음악과 일본 드라마의 ‘한국적 변종’ 정도인가? 미스 코리아 대회와 싸워온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나, 노조 불허를 ‘철학’으로 아는 한 기업가에게의 ‘철학 박사’ 학위 수여를 반대한 한국 학생들의 멋진 이야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들로 고생하거나 고민하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분명 호소력이 높겠지만 진작 그런 내용은 한류에서 빠져 있다. 소비주의의 모습만이 아닌, 비판적 지성과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의 나라로서의 ‘코리아’를 문화적 수단으로 알리는 것이야말로, 한류를 아류 제국주의의 수준에서 국제 민중의 연대 방법으로 끌어올리는 길일 것이다.”
(박노자, 「한류, 자랑스럽기만 한가?」에서)

  (3)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을 심층 면접한 두 교수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분이다. 오해 말고 들어보라(나도 얼치기 개신교 신자이니, 개신교에 대한 반성적인 자기고백이라고 이해해 주기 바람).

  “규모가 큰 개신교 교단의 신학교 졸업생만 한 해에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교단 하나의 사정이 이러한데 많은 교파로 나뉜 개신교 교단의 전체 신학교 졸업생수는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많을 것이다. 반면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배출한 예비신부는 많아야 70명이라고 한다. 목사들은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사활을 건다. 자기 전 재산을 투자해 개척하고 가족의 생계를 담보로 목회를 한다. 그러다 보니 교회마다 건축과 교인 300명 돌파가 목표다. 그런데 종교사회학에서는 교회의 공동체성이 유지되는 한계점을 300명으로 본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떻게 하든 300명을 돌파하려고 한다. 천주교는 주임신부도 5년마다 교체된다.”
(뉴스앤조이 인터넷판(2006.11.8)에서)

  언어소통은 중립적 공간이 아니다. 불가침 공간이 아니다. 도리어 가장 경쟁적인 전쟁터가 바로 언어소통 공간이다. 제3세계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순간, 이미 한국어는 그저 ‘언어 중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에게 영어가 그러하듯이, 동남아인들에게 한국어는 성공으로 가는 사다리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국 문화를 소비하는 고객이자, 한국어 교육의 좋은 먹잇감이다. 반면에 60만 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 국제결혼여성 및 그 자녀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자원봉사자들의 ‘선의’에 맡겨져 있다. 그들의 자녀는 ‘코시안(Korsian)’ 이름으로 마을이든 학교든 아무런 체계적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제도를 도입하느냐는 우리도 문화제국주의의 아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하는 가늠자 구실을 할 것이다.
  각 대학에서 경쟁적으로 개설하고 있는 한국어교사양성 과정도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 교육적 요구라는 명분 뒷면에 경제적 동기에서 출발했다는 혐의가 짙다. 비록 양질의 교사 선정을 위해 국립국어원에서 이들에게 필기시험과 시강과 면접시험을 통해 교사자격증을 부여하고 있지만, 대학을 비롯한 각 기관에서 경쟁적으로 ‘양산된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볼 때 다소 힘에 부쳐 보인다. 수료증만 있어도 강의를 맡을 수 있는 기관이 꽤 있다. 한국어교사양성 프로그램에서 실습 시간 포함 120시간 이상을 이수하면 응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보면서, 영어 교사가 부족하다고 하여 다른 과목의 교사들을 130여 시간 연수하여 영어 교사 자격증을 남발하는 비교육적 전철을 제발 밟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한국어교사도 엄연한 교사인 한, 한국어에 정통해야 하며 한국어를 가르치는 방법에도 정통해야 한다.
  우리 시대 한국어 교육이 무책임한 물량공세로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교단에서만 신학생을 1,000명이나 배출하면, 사람들이 보살펴야 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불러 모아야 할 물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게 자연 이치 아니겠는가. 아울러 ‘한류 시대’의 한국어 담론이 지나치게 아류 제국주의의 길을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책도 영어 제국주의, 일본어 제국주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제3세계에 뿌린 것은 자신들의 언어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국의 정치·경제적 헤게모니와 문화적 우월성을 인증받기 위한 권력적 행위를 한 것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유명한 “기호의 제국”이란 책에 아시아 문화의 대표로 일본의 음식과 젓가락, 가부키만이 소개될 때, 그리하여 아직도 서구인의 의식 속에 아시아에서 가장 정제되고 고급스러운 문화는 일본 문화 정도밖에는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동안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다른 나라에 엄청난 액수의 기금을 퍼부었음을 알고 우리의 어설픈 상황이 겹쳐서 억장이 무너질 때가 있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말고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언어는 위험하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면 최소한 한 명당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사람이듯 당신들도 온전한 사람이므로, 당신들과 평등하게 소통하고 싶다’는 다분히 낭만적이지만 소중한 마음으로 한국어를 전파했으면 좋겠다. 한국어 담론만큼은 눈물겹도록 아름답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