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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솔직히 오늘을 살기도 빠듯한 세상에서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며 사는 이 몇이나 되겠는가. 삶의 무게는 그리 녹록지 않아 세월 좋게 옛날 얘기를 하며 살 짬을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말의 주목적이 소통이라고 한다면, 어원은 불필요하거나 부차적이다. 어원은 역사이다. 말 속에 숨겨진 역사를 복원한다. 언어학에서 어원을 따진다고 해서 현재의 바뀐 의미가 교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원을 따질 때 그 단어 속에 묻힌 시대의 땟물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에는 지금 여기에서 쓰는 언어, 지금 당장 건네지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사는 사람은 실제로 없다. 현재 때문에 현재를 사는 것일 뿐.
  그런데도 우리가 어떤 단어의 어원을 알게 되면 그 단어의 진실보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어원 덕분에 ‘이중 복사의 효과’를 맛볼 수 있다. 이중 복사의 효과란 씌어 있던 문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을 쓴 종이처럼 하나의 단어 속에서 두 개의 흔적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과거가 현재에 동시에 겹쳐서 보일 때 어지럽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그래도 어원을 따져야 할 때가 있다면 잘 따져야 한다. 어원을 따질 때는 왜곡을 하면 안 된다. 왜곡은 현재의 욕망이 반드시 개입한다. 현재화된 과거, 또는 과거화된 현재는 그럴 때 불행하게도 탄생한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대부분 군대 생활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숨 막히는 상명하복의 체계였더라도 거기에서 빠져나온 지금은 아련한 추억거리가 된다. 누구나 현재는 불분명하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분명한’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된다. 그래서 군대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고, 군대 다시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어린 자식들을 앞에 앉혀 놓고 전해 주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이야기도 늘 아름답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영웅이자 신(神)이다. 말이 거듭될수록 그는 더욱 더 무오류의 영웅이 된다. 대책 없는 실패와 좌절도 인생의 궁극적 성공을 위해 설계된 여정의 일부분으로 바뀐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해 내뱉었던 말을 지워버리고 돌아앉으면, 아무런 말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하는 한 집안의 가장이 남을 뿐이다.
  지난 8월 10일부터 18일까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주최로 한국, 일본, 대만, 오키나와의 평화활동가들이 함께 일본 총리와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는 기행과 촛불집회를 열었다.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에서는 한일 간 문화 교류의 상징이었던 조선통신사의 여행길을 따라 부산에서 배편으로 출발하여 시모노세키, 오사카, 도쿄까지 이르는 대장정을 기획했다. 나는 야스쿠니 신사 반대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애 첫 일본 여행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만난 일본인이나 재일 한국인 대부분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런 건 일부 직업 정치인들의 ‘액션’ 정도로만 보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하단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지나간 역사의 어원보다는 지금 자신의 현재형이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하면서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했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는 유취관(遊就館)이라는 군사박물관이 있다. 야스쿠니에 깔려 있는 이중 복사의 효과는 바로 이 유취관에서 절정을 이룬다. 유취관 앞 뜰에는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과 함께 그들의 나라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 5천여 전사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고 쓰여 있다. 그들은 예전의 잘못된 글씨를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무기력한 현실보다는 예전의 동북아를 호령하며 써놓았던 붉은 글씨의 흔적을 복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름다운 과거, 대동아 경영의 과거가 그리운가 보다.
  우리와 엉켜 있는 그들의 근대사 하나하나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사진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중년의 신사 하나가 졸졸 쫓아오며 ‘이곳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고 역정을 냈다. 속으로 ‘무식한 조센징’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들의 화려했던 역사가 깊이깊이 아로새겨져 있을지 모르지만, 불패의 신화를 쌓으며 대륙과 대양으로 침략해 나가면서 그들이 죽여버린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들은 과거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실패한 과거, 부끄러운 과거에만 무관심할 뿐이다. 전쟁 영웅, 승전보, 자신들이 개발한 성능 좋은 총과 대포와 전투기, 가미카제처럼 사람이 안에서 조종하여 상대를 타격하는 자살 병기 인간 어뢰, 위안부의 피로 쓴 일장기, 6천여 전몰자 사진 속에서 발견하는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전설적인 승리는 가슴 속에 꼭꼭 담아둘 보석 같은 과거이다.
  유취관에는 일본의 옹졸함을 극명히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다. 전시관 말미에 나란히 달아놓은 두 개의 패널인데, 하나는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장면이고 하나는 일본 천황의 항복을 위한 어전 회의 모습이었다. 원폭 투하를 설명하는 패널에는 그 흔해빠진 원폭 투하 사진 하나 없이 여백만 덩그러니 남겨 두고 그저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다고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 일본 국민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내리시는’ 천황의 회의 주제 모습을 화려하게 그려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비참한 패배와 항복도 역사적 결단이고 국민을 위한 결단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 한국과 중국, 대만 등에서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평화를 외치는 그들의 말 뒤편으로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설지운 글자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과거를 어떻게 현재화하려고 하는지, 특히 동북아 여러 나라 국민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죄책감도 없이 오직 승리의 역사만을 기록한 저의가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역사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인정한다. 그러나 그 주관은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인 것이지 사실 자체의 변경일 수는 없다.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의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기록하지 않고,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은 평화와 화해를 말할 자격이 없다. 야스쿠니가 일본의 침략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친절한 일본을 보고 싶은가? 아무 가게나 들어가 보라. 쉽게 만날 수 있다. 무서운 일본을 보고 싶은가? 야스쿠니 안의 유취관에 가보라. 일본의 뭇백성들을 어떻게 전쟁에 동원했고, 어떤 신화를, 어떤 어원 의식을 심어주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소름끼치는 침략성에 치가 떨릴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일본의 독립과 아시아인들과의 번영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말 앞에는 ‘거룩한 분노’가 생긴다. ‘유취관’(遊就館)의 어원이 ‘군자는 거주할 때에는 장소를 택해야 하고 배울 때에는 훌륭한 선비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순자』의 얘기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유취관은 ‘훌륭한 선비’가 ‘훌륭한 전쟁주의자’라고 겹쳐져 있고, 일본의 그 고즈넉한 신사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삼중’ 복사의 효과를 발휘하며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다. 이런 어원 안 따지게 될 날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