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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연세대 교수)

  ‘부모님의 은혜는 가이없어라’, ‘가없는 들판 중앙에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나고 있었다’, ‘의지할 곳 없는 가엾은 존재가 되었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가이없다’나 ‘가없다’는 ‘끝이 없다’는 뜻이고, ‘가엾다’는 ‘딱하고 불쌍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어휘는 사전마다 각각 다르게 처리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가이없다’를 “‘가없다’의 잘못”으로 처리하고 있고,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과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서는 “‘가엾다’를 가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말큰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서는 ‘가이없다’를 ‘가엾다’와 같은 어휘로 보았고, 《표준국어대사전》은 ‘가이없다’를 써서는 안 될 어휘인 양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연세한국어사전》에는 ‘가이없다’가 아예 올림말로 올라 있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언어생활에서 ‘가없다’보다도 ‘가이없다’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그리고 그 뜻도 ‘끝이 없다’는 뜻이다. ‘불쌍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없다’도 마찬가지다. ‘가없다’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에서는 모두 ‘끝이 없다’란 뜻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가없다’란 단어는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다. 결국 세 사전 모두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사전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 세 단어의 형성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가이없다’와 ‘가없다’와 ‘가엾다’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어휘 같지만 실제로 그 말의 뿌리는 하나인데, 어휘 분화 과정에서 의미나 쓰임새가 달라졌던 것이다.
  ‘가이없다’는 ‘가이’와 ‘없다’로 분석될 수 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가이없다’를 두 단어로 인식하여 ‘가이 없다’처럼 띄어쓰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러한 증거다. 그리고 ‘가이’는 ‘없다’의 주어가 되므로 ‘가이’는 ‘가 + -이’로 분석되고 ‘-이’는 주격조사임이 분명하다. ‘가이없다’가 ‘끝이 없다’는 뜻이어서 ‘가’는 ‘하늘가, 바닷가, 물가, 강가’ 등의 ‘가’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이없다’에서 주격조사 ‘-이’가 쓰이지 않으면 ‘가없다’가 된다. ‘가없다’나 ‘가이없다’의 ‘가’는 원래 ‘’이었다. 그래서 이 두 단어가 처음 등장할 때에, ‘가없다’는 ‘없다’, ‘가이없다’는 ‘없다’로 나타난다. 모두 15세기부터 문헌에 나타난다.

다가 虛空브터딘댄 虛空性이업슬므리 반기 업디라 <능엄경언해(1461년)>
;衆生快樂이 衆苦며 목숨이  업스니 <월인석보(1459년)>
虛空애셔 날딘댄 虛空이  업슬므리 반  업슬디라 <칠대만법(1569년)>
布施야 一切 含生너비 恭敬면 그 功德이  업서 며 혜디 몯리라 <금강경언해(1475년)>

  ‘없다’는 ‘잇다’로는 등장하지 않아서 이미 한 단어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없다’는 ‘ 잇다’로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 없다’는 15세기에는 완전히 한 단어로 굳어진 것 같지는 않다.

 업고 和티 아니면 다 이런로 반기  이시리어 <능엄경언해(1461년)>

  이 ‘없다’의 ‘’은 ‘ㅿ’이 어간말음에서 ‘ㅅ’으로도 표기되므로 ‘없다’는 ‘없다’로도 표기된다. 역시 ‘ 잇다’의 예도 발견된다.

經 니佛은 이 受用身이시니 이 淨土ㅣ 量 이업슨 젼라<원각경언해(1465년)>
져그나도디 몯면 미 업슨 이레 디니라<경민편언해 중간본(1579년)>
物이 形 업슨  이시며 거리 虛ㅣ 다  잇  아디 몯 젼라<선종영가집언해(1464년)>

  그러나 ‘’이나 ‘’에서 말음이 탈락하면 ‘’가 되어, ‘없다’나 ‘없다’는 ‘없다’가 되는데, 이것은 16세기에 일어난 변화다.

내 가 픠오 이리 업서 주거도 너 이더도록 셜워턴 줄 모 거시니 <순천김씨언간(1565년)>
듀일 시기나 보와니 죽거지라 워니로다마 오래 살가 근시미 업다 <순천김씨언간(1565년)>
하 업 일 디내니 안자셔 각거든 눈므리 마고 흐니 <순천김씨언간(1565년)>
긴 놀애예 디 업스니 됴히 날 爲야 드르라 <두시언해중간본)(1613년)>
高堂에 戱綵홈애 즐거옴이 업니 座에  春風에 笑語ㅣ 도다 <오륜전비해(1721년)>
내 前程이 아조 업시 되고 切迫 졍이 되오니 十分 顧念셔 <인어대방(1790년)>

  한편 ‘ 없다’는 16세기에 ‘ㅿ’이 탈락한 ‘이없다’로 등장하게 된다.

그 德을 일우면 머리 누르고 치 언  야 이 업서 하 복경을 받오리라 <소학언해(1586년)>
봄과 녀름에 제여곰 여르미 잇니 내 주류믄 엇뎨 이 업스리오 <두시언해 중간본(1613년)>
하히 길고 바다히 너니 이 이 업도다 엳더라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년)>

  ‘없다’나 ‘없다’, 그리고 ‘이없다’는 ‘’과 ‘’의 ‘ㆍ’가 ‘ㅏ’로 변화하여 ‘갓없다’나 ‘가없다’, 또는 ‘가이없다’로도 표기되었는데, 그 시기는 ‘ㆍ’가 비음운화된 18세기 이후이다.

북두칠성을 바고 갓업시 도망 제<유충열전(19세기)>
혈긔 미졍신 바의 지통이 가업믄 니도 말고 <엄시효문(19세기)>
부인과 구파의 가업시 반김과 한업시 두굿거워 듕이나 <명듀보월빙(19세기)>
公계셔 老當益壯오신 얼골과 熟手端의 말을 듣오니 긷부기 가이 업외다 <인어대방(1790년)>
밤에 이 잇서 빗최 거시 가이 업며 <진리편독삼자경(1895년)>

  그래서 ‘없다’와 ‘없다’는 다음과 같은 형태변화를 겪어 오늘날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없다/없다 > 없다 > 가없다
없다 > 이없다> 가이없다

  ‘없다/없다’나 ‘없다’는 15세기나 그 이후의 문헌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인 적은 없다. 원래 ‘/’이나 ‘’는 공간적 처소의 ‘가’[邊]의 의미가 있어서 ‘강가, 물가, 하늘가’의 ‘가’처럼 쓰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境은 나랏 오 <월인석보(1459년)>
邊은 라 <월인석보(1459년)>
긼  누엣거늘 <석보상절(1447년)>
렬뷔 졋 먹 아기 안고 쳐 애 다라 아기란 애 노코 므레 라들어늘 <삼강행실도(1471년)>
우믌 애 드레와 줄 다 잇니라 <번역노걸대(1517년)>
 애 댓 가지 누늘 디내여 덥츠럿 <백련초해(1576년)>
나 녀 셔 믌 애 왯거 내 죵 오히려 나모 그테 잇도다 <두시언해 중간본(1613년)>

  그러나 ‘없다/없다’나 ‘없다’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의 ‘’[邊]의 의미로는 잘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이 원래는 공간적 처소로서의 ‘끝’이라는 뜻이어서, ‘없다’나 ‘없다’는 공간으로서의 ‘끝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점차 공감각적 은유로 표현되어 심리적 표현에 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두 어휘는 그 표현의 주체가 처소나 공간이 아닌, ‘깃븜, , 그리옴, 안ㅎ, 졍회(情懷), 졍(情)’ 등과 같은 심리적인 요소이다.

깃브미 이업서 거니와 <순천김씨언간(1565년)>
하 없 은덕을 어 다혀 갑오리<경민편언해(1658년)>
熟手端의 말을 듣오니 긷부기 가이 업외다 <인어대방(1790년)>
부득이 송별하오나 창연하오미 가이 업도소이다 <김진옥젼(19세기)>
서르 사도 아디 몯다가 만나보니 이 업 졍회 다 니랴 <병자일기(1646년)>
념녀며 멀리 각 졍이 이 업서 노라 <병자일기(1636년)>
親 벋이라도 餞送여 相別 제 섭섭 이 이 업서 暫間이라도 挽留코져 니 <인어대방(1790년)>
그몸날 그리오 이업다 <순천김씨언간(1565년)>
大君도 거르기 喜悅이 이 업고 <첩해신어(1676년)>
나 이 길고 보 슬프미 이 업더라 <양현문(19세기)>

  그러나 ‘없다/없다’나 ‘없다’가 심리적 표현의 주체를 표시하지 않고 단독으로 쓰이게 되기도 하는데, 이때의 의미는 단순히 심리적으로 ‘끝이 없다’는 뜻만이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애닯다, 안타깝다, 불쌍하다’는 뜻도 내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 예문에 보이는 ‘이업슨 일’은 ‘끝이 없는 일’이 아니라, ‘애닯은 일, 불쌍한 일’로, ‘이업서 울고 안자더니’는 ‘안타까워 울고 앉았더니’로, 그리고 ‘블의 긔벼리 오니 이업다’는 ‘불의에 기별이 오니 애달프다’의 뜻을 지니게 된다.

노샹의 서 나니 글언 섭섭고 이업 이리 업더라 <병자일기(1636년)>
이 난을 각니 이업서 울고 안자더니 오후의 박진 오니 반갑기 아라타 업서 노라 <병자일기(1636년)>
과연  사과 안쟈셔 먹다가 하 이업서 당시 듯디 아녀시니 먹노라 더라 <서궁일기(17세기)>
오후의 형님 부음이 오니 이업고 슬프미 아라타 업다 <병자일기(1636년)>
너 양 엇더고 다니 블의 긔벼리 오니 이업다 <순천김씨언간(1565년)>

  ‘없다’가 이러한 심리적 표현에 쓰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없다’와 유사한 구조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른 어형에 유추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없다’와 유사한 구조와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지없다’(긎(限) + -이 + 없다)와 ‘그티 없다’(긑 + -이 + 없다)를 들 수 있다.

心念은 어즈러워 그티 업거니와 <능엄경언해(1461년)>
외 根源ㅅ 그티 업스니라 <능엄경언해(1461년)>
舍衛國大臣須達이 가며러 쳔랴 그지업고 <석보상절(1447년)>
地獄애 러디여 그지업슨 受苦니 <월인석보(1459년)>
無量義 그지업슨 디라 혼 마리라 <월인석보(1459년)>
諸佛ㅅ 智慧 甚히 깁고 그지업스샤 <월인석보(1459년)>

  ‘그티 없다’는 ‘끝이 없다’는 뜻이고 ‘그지없다’는 ‘한(限)이 없다’는 뜻이며, ‘없다’는 ‘가(邊)이 없다’는 뜻이어서 그 의미는 서로 중첩되는 경향이 있어서 특히 ‘그지없다’가 심리적 표현에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없다’가 여기에 유추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이없다’나 ‘가없다’가 이러한 심리적 표현에 쓰이면서 원래 지니고 있던 의미에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애처롭다, 안타깝다, 애달프다, 딱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결과 ‘가없다’와 ‘가이없다’는 ‘끝이 없다’와 ‘불쌍하다’의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 어휘에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다른 의미를 갖게 되자 그중의 ‘불쌍하다’에 대응되는 단어가 생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가엾다’이다. ‘가이없다’의 음운변화(음운축약)를 일어나서 생겨난 단어인 ‘가엾다’에 ‘끝이 없다’는 의미를 빼어 버리고 ‘불쌍하다’만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갓치 궁벽한 산 속에서 장래의 만은 날을 엇지 보내랴는지 가엽슨 일이다. <생륙신전(19세기)>
그의 아들 우직이 넘어나 가엽서서 <생륙신전(19세기)>
슈삼년 젹니의 가엽 고초 문답여 셕미 측냥업니 <엄시효문(19세기)>
그 壁이 漸漸 엷어저 가는 듯 하며 가엽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일어낫섯다 <빈처(1921년)>
ꡔ마님 어서 건너 가 보세요ꡕ 하고서 가엽슨 듯이 주저주저하고 서 잇다. <春星(1923년)>
ꡔ어멈이 종일 업서서 만히 울엇지? 배가 곱핫서 에그 가엽서라. 자 인제는 실컷 먹어라. <自己를찻기(1924년)>
지금지 「나만한 얼골이면」하는 자만심 잇든 젊은 게집들에게 가엽게도 자가결함(自家缺陷)이 폭로되는 환멸을 늑기게 하기지도 하얏다 <(1925년)>
일평생을 그대로 썩는다는 것은 넘어 가엽고 앗갑지 안으냐? <물레방아(1925년)>

  ‘가엾다’가 ‘없다’로 표기된 예도 전혀 보이지 않고, 그리고 문헌에서 ‘가엾다’가 19세기 이후의 문헌에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가엾다’는 19세기에 생긴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한 단어가 두 가지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언중이 그 뜻의 유연성(有緣性)을 인정하지 못할 정도가 되니까 그중의 한 의미를 그 단어의 음운변화형에 배당한 것이다.
  ‘없다/없다’는 원래 ‘가(邊)가 없다’는 뜻을 가지고 생겨난 말이다. 여기에 주격 조사 ‘-이’가 붙으면 ‘ 없다’가 되는데, 이 ‘없다/없다’와 ‘없다’는 그 쓰임새나 의미가 동일하였었지만 ‘없다’가 주로 문학적 표현에 쓰이면서 ‘불쌍하다’의 의미가 첨가되니까, 이 의미를 ‘가이없다’의 음운변화형인 ‘가엾다’에 넘겨, 그 결과로 세 단어의 변화형인 ‘가없다’(<없다/없다)와 ‘가이없다’(<없다), ‘가엾다’(<가이없다)는 각각 독립된 어형을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의미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가이없다’는 ‘끝이 없다’의 문학적·정서적 표현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정서적 가치가 없는 ‘끝이 없다’의 의미를 가진 ‘갓없다’는 ‘가없다’로 남게 되었지만 ‘가이없다’에 밀려 점차 사라질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가이없다’에서 나온 ‘가엾다’는 ‘가이없다’에서 파생된 ‘불쌍하다’의 의미로만 사용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