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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신문에서 제목은 간판 구실을 한다. 좋은 제목은 본문 내용의 요지를 드러내면서도 기사 내용을 돋보이게 하여 결국은 신문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 큰 힘을 발휘한다.
  앞으로 일간 신문의 제목을 대상으로 정확성, 압축성, 간결성, 참신성 등을 기준으로 삼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해 볼까 한다. (출처는 신문 제호, 발행 월일과 수록 면순으로 밝히되 제호는 흔히 불리는 약칭을 사용한다. 다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 용례에는 제호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 시각차에 따라 달리 해석될 소지가 있는 내용으로 해당 언론사에 상처를 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사 본문 내용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운율까지 살린 예를 본다.

  ① 이 부자 참부자 (중앙, 6. 19. E13.)
        <父子><富者>
  ② 佛 “못 끌걸”/伊 “못 뺄걸” (세계, 7. 8. 20.)

  ①은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따로 사업하여 둘 다 크게 성공했고 남을 열심히 돕기도 한다는 내용. ‘부자(父子 · 富者)’라는 동형어(장단은 다르지만)를 활용한 여섯 글자로 본문 내용을 압축하고 가치 판단까지 곁들였다.
  ②는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독일 베를린에서 세계 축구의 정상 자리를 놓고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는 내용. ‘못 끌걸’과 ‘못 뺄걸’의 첫 음절과 끝 음절을 맞추며 리듬도 살렸다.

  다음은 연상되는 말을 동원한 예다.

  ③ “발 과장, 당신의 손이 더 필요해요” (동아, 7. 1. 24.)
     <Balson>

  한국은행에서 18년간 영어 번역을 맡아 온 발슨(Balson) 씨가 정년 후에도 남기로 했다는 내용. 평소 그가 ‘발(←Balson) 과장’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기사 본문에서 밝혔다. ‘발’ 하면 바로 연상되는 ‘손’을 동원하되, 그 손이 ‘일손’임을 알리는 재치를 보였다.

  다음엔 한자(漢字)를 활용해 만든 예를 보자.

  ④ 4년 뒤엔 우리도 伊들처럼… (매경, 7. 11. A33.)
  ⑤ 소처럼 일했더니 행복이 牛르르 (6. 30. 14.)

  ④는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꺾고 월드컵에 4회 우승을 한 일을 두고 우리 한국도 이탈리아처럼 정상에 올라가 봤으면 하는 소망을 드러내며 ‘우리도 그들처럼’이라는 영화 제목을 원용하였다. ‘伊(이)’가 ‘이탈리아 사람’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⑤는 송아지 세 마리를 20년 만에 800마리로 불린 부농(富農)의 이야기. ‘牛르르’의 ‘牛’는 소를 나타내는 효과를 노린 듯하나 나머지 ‘르르’를 무의미한 철자로 남겼다. 또 ‘우르르’가 대체로 사람이나 동물 따위가 한꺼번에 움직이거나 한곳에 몰릴 때, 액체가 갑자기 끓어오르거나 넘칠 때, 쌓인 물건들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거나 쏟아질 때,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거나 천둥이 울릴 때 쓰이므로, ‘행복’과 어울리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다. 한자를 제대로 익히지 못한 독자가 고유어 ‘우르르’를 ‘牛르르’로 오해할 우려도 있다.

  다음에는 단어 선택이 적절하지 않은 예를 보자.

  ⑥ 세계 4위 갑부 캄프라드 “무덤엔 한 푼도 안 갖고 가” (6. 27. 29.)
  ⑦ 초토화된 인제 덕산리 주민들의 고통 (7. 18. 9.)

  ⑥의 ‘갑부(甲富)’는 ‘부자’와 같은 말이 아니다. ‘최고의 부자’, ‘일등 부자’가 ‘갑부’다. ‘충주 갑부’라 하면 충주에서 첫째가는 부자요, ‘당대의 갑부’라 하면 당대에 으뜸가는 부자인 것이다. 이런 뜻을 지닌 ‘갑부’에 ‘4위’를 붙일 수는 없다. ‘일등’이면 ‘일등’이지 ‘네 번째 일등’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④의 ‘갑부’는 ‘부자’로 바꾼다.
  ⑦의 ‘초토화(焦土化)’는 수해지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초토’란 불탄 땅이다. 특히 전란(戰亂)으로 불에 타서 땅이 검게 그을리고 황폐해져 못 쓰게 된 상태를 나타낸다. “특정지역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군사작전”이 ‘초토작전’이다. 이 밖에도 “영화계 초토화”, “게임시장 초토화”처럼 사물이 불타 흔적 없이 사라짐을 비유할 때에도 쓰인다. ⑦의 ‘초토화된’은 ‘폐허가 된’이나 ‘쑥대밭이 된’으로 고쳐 쓰는 것이 무난하다.
  기자들의 고뇌와 열정이 스민 지면(紙面), 지면의 꽃이라 할 제목. 이 제목이 정보와 울림이 있을 때 우리에게 더 큰 기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