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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치과 치료에 ‘오디아크(audiac)’라는 장치가 있다고 한다. 환자의 머리에 헤드폰을 씌워놓고, 드릴로 이를 뚫는 고통을 느끼지 못할 때까지 소리를 높이는 장치이다. 고도의 감각 자극을 신체에 가함으로써 마비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사회적 담론 중에서 오디아크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이 있으니 바로 구호이다. 구호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사회적 문제점들을 일거에 요약·정리한다. 엄혹하게 실재하는 개인의 삶의 짐들,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오직 하나의 통로를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최면을 건다. 구호를 힘주어 외치든 어깨 너머로 바라보며 서성거리든, 구호가 만들어 내는 감동적인 가상현실은 개인의 지지부진한 삶을 치환해 버린다. 치열한 고민과 고통 속에서 발견해야 할 삶의 가치나 태도는 단일한 구호 속에 파묻히고, 그러한 고민과 고통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보이며, 구호가 들리는 곳으로 취한 듯 걸어가게 만든다.
중학교 시절 학교 현관에 붙어 있던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손가락을 곧추세우고 “당신은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며 윽박지르던 그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구호는 어린 아이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생략하고 곧바로 ‘조국’을 위한 삶, 그 조국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상관없이 ‘아버지 조국을 위해 나는 무엇을 기여할 것인가?’를 곱씹게 했다. 독재정권은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며 마을 청소를 시켰고,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약간의 억압을 ‘참고, 참고, 또 참는’ 캔디로 만들었다.
정권이 만들던 구호를 이제는 자본이 만든다. 지난 6월 한 달 동안 우리는 새벽에 깨어나 홰를 치는 닭처럼 “대~한민국”을 외쳤다. 이 구호는 폭력적 은유이다. 텔레비전 광고든, 막대기 풍선이든, 티셔츠든, 두건이든, 빌딩 펼침막이든 어디에서나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구호의 숲에서 헤엄을 쳤다. 우리는 대한민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도 대한민국이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지금, 우리는 정말 대한민국인가? “공이 수비수에 맞았기 때문에 오프사이드가 아니다”라고 말한 축구 해설가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단죄한 우리는 정말 대한민국인가? 나에게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말은 결국 순혈주의로 똘똘 뭉친 파시스트들의 기도문 같아 보인다. 오프사이드 판정을 기준으로 애국과 매국을 구별하려는 단순명쾌함은 파시스트적 사고와 거칠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파시스트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사고와 판단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일성(全一性)을 강조하는 구호는 늘 숨이 막힌다. 80년대 대학가에서 자주 외치고 노래로도 불렀던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위해’라는 구호도 모든 사람을 단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 구호는 ‘모두가 하나를 위하는’ 실현 불가능한 꿈보다 모두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만만한’ 하나를 강조한다. 누군지도 모를 ‘모두’를 위한 삶이 ‘가장’ 가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며 달라야 한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운동은 개인의 자유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유보해야 하는 자체 모순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확보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냐 하는 것이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흔쾌한 참여인가, 아니면 ‘물 샐 틈 없는’ 조직과 훈육과 동원 시스템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이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외쳤던 월드컵 구호는 부끄러운 실패였다.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구호가 진정 뭉클한 감동과 공명을 주는 때는 바로 이런 상황이다. 절대로 대한민국 사람일 수 없고 대한민국 사람이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써야 한다. “나는 당신을 반대한다. 그러나 나는 목숨을 걸고 당신이 말할 권리를 방어하겠다.”는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말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때 그 구호는 흥겨워진다. 한국 땅에 와서 생산의 한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당신들도 대한민국이다.”라고 할 때, 사회적 격차가 땅콩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상황에서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버림받은 이들에게 “당신들도 대한민국이다”라고 할 때, “6.25는 통일전쟁이었다”고 말하는 학자에게 “당신의 주장에 반대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대한민국이다”라고 할 때. 그럴 때 “우리는 대한민국입니다”라는 구호 속에서 감동을 얻는다. 광화문에서 일심단결하여 “대~한민국”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느낄 뭉클함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구호의 무게가 너무나 진중하다. 일본 정부가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센징도 일본이다.”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쉽지 않은 일 아닌가?
강자에게 그 말은 면죄부일 뿐이다. 불의한 강자에게 그 말은 빠져나갈 구멍일 뿐이다. “나도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해 왔다. 그러니 나의 불의를 눈감아 달라”는. 반면에 약자에게 그 말은 눈물겨운 희망의 지푸라기일 수 있다. 약자는 강자보다 개인적 불의를 저지를 가능성이 더 많다. 그래서 ‘불의한’ 약자, 또는 무능한 약자에게 그 말은 커다란 위로이자 희망이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하는 말이다.
투혼을 발휘했으나 축구대표팀은 16강 진출에 실패했고, 오프사이드라고 말한 해설자는 강제 송환(!)되었다.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한 달 동안 외치던 우리는 식당에서 “밥 빨리 안 나오냐”고 말하는 그 순간 밥이 나올 때처럼 머쓱하다.
‘나는 나이다’라는 하나마나한 담론도 위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나는 대한민국이며, 우리는 대한민국이다’라는 담론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 위험을 피하는 길, 오디아크 장치의 볼륨을 최대로 올리기 전에 ‘나’를 발견하기. 그리고 또 다른 ‘나’들의 힘겨운 고통에 용기 있게 대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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