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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정(카피라이터)

  카피라이터는 언어의 유행을 좇는 사람이다. 어느 해에는 아찔한 미니스커트가, 이듬해에는 바닥에 끌릴 만큼 긴 치마가 거리에 가득한 패션처럼 언어에도 유행이 있다. 특히 영화 광고의 경우, 광고 기간이 짧고 특별히 생활에 필요한 상품이 아닌, 사람들의 심리에 철저하게 기댄 상품이다 보니 다른 상품 광고보다 언어의 유행에 훨씬 민감하게 된다.
  97년부터 영화 카피를 쓰기 시작했다. 올해로 10년째인 셈이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다 보니 영화 카피가 겪어온 변화 역시 만만찮다. 90년대 후반, 영화 광고의 대세는 ‘영어’였다. ‘블록버스터’라는 단어가 최고의 유행어이자, 흥행의 보증수표처럼 사용되었고 ‘판타지’, ‘스릴러’ 등 다양한 영화장르들 역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매머드 러브 액션 로망’, ‘미라클 블록버스터의 메가톤급 공습’. 지금 보면 참 어색한 언어들이지만 할리우드 외화가 박스 오피스를 점령했던 당시 추세다 보니 최대한 할리우드의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흥행을 부르는 광고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한국 영화가 박스오피스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밀어낸 뒤, 영화 광고의 카피 역시 한국어의 참맛과 행간을 읽게 하는 카피가 사랑받았다. ‘통하였느냐?’라는 카피는 우리말만이 가질 수 있는 오묘한 어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카피다. ‘통’이라는 단어가 ‘contact’나 ‘communicate’ 등으로 직역될 수 없는, 그 단어들 모두의 뜻을 아우르는 절묘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비단 단어뿐 아니라 문장의 구조로 ‘맛’과 ‘멋’을 전하는 카피들도 자주 등장한다. ‘세상은 나를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처럼 문장 연결로 맛을 주는 경우나 ‘세상, 그 위로 날아오르다.’, ‘사랑! 해보셨습니까?’ 와 같이 문장부호의 묘미를 살린 카피 등 어색한 외국어 없이, 모두가 늘 쓰는 말에 새로운 표정을 안겨주는 카피의 예이다.
  그러나 2006년, 광고의 카피는 새로운 유행의 파도를 맞고 있다. 바로 ‘이모티콘’과 ‘신조어’, ‘다양한 줄임말’ 들로 시시각각 유행어를 쏟아내는 ‘통신언어’이다. 파격과 일탈을 특징으로 하는 언어들인 탓에 광고 카피에 적용시키다 보면 주목률은 높아지지만 문득,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카피라이터는 리트머스 용지라고 생각해 왔다. 대중이 산성이라면 붉게, 염기성이라면 푸르게, 언어의 성질을 걸러내어 색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카피라이터라고. 그러나 10년차가 되고 보니 카피라이터는 ‘충성스런 요리사’라는 생각이 든다. 손님이 자극적인 인스턴트 음식을 좋아한다 해도 조미료를 넣지 않고 무공해 음식으로 정성들여 요리해야만 손님의 입맛도 건강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는데, 카피라이터 10년에야 글쓰기의 책임감을 알게 되었다. 이제, 비로소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통’한 것일까? 부디,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니기를 소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