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있는 글 
말의 뿌리를 찾아서 
이런 일을 했어요 
설왕설래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우리말 다듬기 
새로 생긴 말 
좋은 글의 요건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일터에서 말하다 
교실 풍경 
국어 관련 소식 
처음으로 | 국립국어원 | 구독신청 | 수신거부 | 다른 호 보기

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전임강사)

  옛날에 비해 요즘 아이들은 산타 할아버지가 가짜라는 것을 일찍 알아차린다. 아이들이 특출하게 영특해져서 그런 게 아니라, 새벽에 몰래 나타나야 할 산타가 대낮에 유치원에도 나타나고 교회에도 나타나고 길거리에도 나타나고 쇼핑몰에도 나타나니 진짜라고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다.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지면 상상력은 일찍 마비된다.
  몇 년 사이에 프로그램 종류와 상관없이 방송 자막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옛날에는 고작해야 외국인을 인터뷰하면서 번역 자막을 내보내는 정도였다. 원래 방송 자막은 청각장애인의 방송 접근권을 높이며 비장애인에게는 정보 전달 효과를 높이기 위해 도입된 장치이다. 그런데 지금은 뉴스, 시사 토론, 토크쇼, 드라마 등 장르에 상관없이 자막을 이용하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궁’을 보면 화면에 자막 처리를 하고 있다. 여주인공이 침을 흘리며 잠을 자면 뺨에 ‘질질’이라고 적는다. ‘열공’ 등 신조어들에 대해선 말풍선을 그려놓고 친절하게 설명을 달아준다. 원작 만화의 기법을 드라마에 적극 도입한 것이다. 이제 자막이라는 텍스트는 영상 미학의 주요 요소로 자리잡고 있고 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자막이 자주 등장한다. 진정한 낭독은 낭독자가 텍스트를 읽으면 다른 이들은 오직 낭독자의 말소리 색깔과 빠르기, 높낮이에 몰입하는 것이다. 청중은 오로지 ‘듣는’ 데 집중해야 한다. 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게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런데 출연자가 자신이 뽑아온 글을 낭독할 때면 어김없이 자막이 나온다. 자막이 나오면 우리의 시선은 자막에 포획된다. 자막은 그저 이해를 돕기 위한 배경이 아니다. 어느새 자막은 주인공이자 초점이 되고 영상이 주변이 된다. 텍스트를 읽고 소리를 참고한다. 텍스트에 눈길을 주느라 쫑긋해야 할 귀는 이완된다. 앞뒤가 바뀐다.
  영상(이미지)에 무미건조한 텍스트를 융합하는 기교는 분명 영상미학의 진보이다. 자막은 이제 더 이상 화면의 하단부에 찌그러져 있지 않고 화면 곳곳에 배치된다. 선적이고 시간적인 특성을 갖는 텍스트가 공간적이고 복합적인 영상에까지 도입된 것이다. 다양한 글씨체로 이미지화된 텍스트가 노출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막이 발휘하는 효과가 참 고약하다. 자막은 전체 맥락을 규정한다. 갈래와 위치에 제한받지 않는 자막의 힘은 막강하다. 이 장면은 ‘황당’한 것이고, 저 장면은 ‘슬픈’ 것으로 규정된다. 자막을 입력하는 사람의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상황을 규정한다.
  자막 속에는 자막을 생산하는 사람의 권력의지가 표현된다. 어떠한 영상이든 그것이 선택되었을 때에는 만든 사람의 의도와 해석이 개입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문제는 자막이 이러한 해석권이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 전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크쇼에서 출연자가 한 발언을 통해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추론하여 출연자 옆 공간에 ‘흐뭇, 당당, 부끄, 답답, 불끈, 황당, 열중, 솔깃, 의기양양, 삐짐’ 등의 어휘를 얹어 놓음으로써 시청자는 출연자의 마음까지도 ‘독서’해야 한다. 출연자의 행동에 대한 해석도 심심찮게 나온다. 행동은 그것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음에도 단일한 해석만이 존재한다. 자막 생산자의 해석만이 존재하는 영상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자막 생산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발화 당사자의 머뭇거림이나 간투사를 소거하기, 비논리적인 말의 엉킴을 정연하게 풀어주기, 부적절해 보이는 단어 수정하기, 비표준어나 외국어를 표준어로 바꾸기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도 프로그램의 목적에 따라, 또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허용 범위가 달라진다. 자막에 비속어나 은어, 비표준어, 맞춤법을 어긴 표현들이 얼마나 많이 노출되는지 살펴보려면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자막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한다. 가공 과정에는 중요하지 않은 잡소리들을 소거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머뭇거림’, ‘뜸들임’, ‘사투리’ 속에 진실이 담긴 경우가 많다. 우리는 화면에 비친 사람을 간접적으로나마 직접 느끼고 싶어한다. 통각하고 싶지 거름종이에 걸러진 메마른 ‘표준’을 원치 않는다.
  자막은 시청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막고 프로그램 제작자의 해석만을 강제한다. 자막은 시청자 각자의 삶과 결부시킨 다양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 공적 공간(그것이 우스갯소리를 하는 곳이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토론의 장이든 상관없이 전파를 타면 공적이다)이 몇몇 사적 해석자들에게 좌우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것이 일상의 피로를 풀어줄 가벼운 웃음을 선물하는 친절함일지라도. 상상력이 소거된 웃음은 불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