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어원
어휘 이야기
한글 맞춤법의 이해
외래어 표기
국어 순화
표준 발음법의 이해
학교문법과 국어 생활
현대시 감상
현장에서
표준 화법
국어 생활 새 소식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
궁금증을 풀어 드립니다
알려드립니다
 현장에서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한규희(韓奎熙) / 기자(중앙일보 어문연구소)
  일선에서 우리말을 바루는 교열기자로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신의 글에 함부로 손을 댔다는 필자의 항의가 있을 때이다. 대부분의 필자는 자신이 어문 규정을 모르고 쓴 단순한 오자를 바로 잡아주면 무척 고마워한다. 그러나 사투리나 한글 맞춤법에는 맞지 않지만 일반인들이 더 널리 쓰는 말, 외래어 표기법의 경우는 사정이 달라진다.
  교열기자의 입장에서는 그 단어가 그 기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없는 한 어문 규정에 따라 수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필자에 따라서는 그 어문 규정을 달가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필자의 의도를 일일이 확인해 지면에 반영하면 더 좋겠지만 신문 제작의 특성상 시간적인 여유도 없을 뿐더러 우리말 표기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럴 경우 종종 충돌이 발생한다. 그래도 필자가 굳이 요구할 경우 작은따옴표를 사용해 수용한다.
  그러나 외래어의 경우는 논외로 치더라도 교열기자의 입장에서도 필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만은 없다. 어떤 단어는 어문 규정에 따라 고쳤을 경우 현실 언어와 너무 동떨어져 글의 맛이 떨어지고 언중(言衆)에게 동의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것들이 그러한 대표적인 예다.
  요즘 시장에 나가 보면 벌써 ‘햇포도’가 나와 있다. 비록 하우스에서 기른 것이지만 제법 먹음직스럽다. 이 ‘햇포도’로 만든 술을 ‘햇포도주’라고 한다. 그러나 ‘햇포도, 햇포도주’ 이 두 단어는 널리 쓰이지만 표기법상으로는 옳지 않다. ‘해포도, 해포도주’라고 써야 한다. ‘그해에 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쓰는 접두사 ‘해-/햇-’은 다음에 오는 말이 모음으로 시작하거나 첫 자음이 된소리나 거센소리이면 ‘해-’(해암탉, 해콩, 해팥)를 쓰고, 그렇지 않으면 ‘햇-’(햇과일, 햇나물, 햇벼, 햇병아리)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포도, 해포도주’라고 쓴 기사를 거의 볼 수 없다. 대부분 ‘햇포도, 햇포도주’로 쓴다. 한글 맞춤법이 무너지는 현장이다.
  사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간밤에 술로 지친 속을 달래러 콩나물해장국집에 가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아주머니, 여기 ‘멀국’ 좀 더 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멀국’은 표준어가 아니다. ‘국물’이라고 해야 맞다. ‘멀국’은 전라∙충청 지역에서 쓰는 방언(사투리)이다. ‘국물’은 국∙ 찌개 따위의 음식에서 건더기를 제외한 물을 일컫는다. 그런데 국에 들어간 고춧가루나 된장, 고추장, 마늘, 생강 다진 것 등을 건더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물’은 건더기가 우러난 물에 온갖 양념이 풀어진 것을 일컫는다고 봐야 한다. ‘멀국’은 국물과 같은 뜻으로 해석되면서도 약간 다른 느낌을 주는 말이다. 콩나물국이나 설렁탕∙곰탕의 국물처럼 양념이 들어가지 않은, 건더기만 우러난 맑은 것을 말한다. ‘멀겋다’에서 온 것으로 보아 ‘멀국’은 ‘멀건 국'이란 뜻이다. 이렇듯 표준어와 사투리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현실 언어에서 어문 규정에 맞는 말보다 더 널리 쓰이는 말이 꽤 있다. 상상의 나래(날개)를 펴다, 봄 내음(냄새)이 가득하다, 고개∙눈물∙시선을 떨구다(떨어뜨리다), 시장에 먹거리(먹을거리)가 많다, 우리 손주(손자)들, 맨날(만날) 싸운다, 여자를 꼬시다(꾀다), 이쁜(예쁜) 내 동생, 니/지(네/제)가 뭐라고, 가고파/보고파/사랑하고파(-고 싶어), 응큼한(엉큼한) 속셈, 굽신거리다(굽실거리다), 오손도손(오순도순), 정신이 맹숭맹숭하다(맨송맨송하다) 등이 그러한 예다(괄호 안이 어문 규정에 맞는 말). 이런 말들은 의성어나 의태어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어문 규정에 맞는 말만이 옳고, 그렇지 않은 말은 틀렸다는 논리는 이제 언중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교육으로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말에도 생명력이 있다. 그들은 언중으로부터 제 나름의 존재 이유를 부여받아 살아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 땅에서 쓰이는 모든 말은 일단 존중돼야 한다. 그들이 독자적인 뜻을 갖고 널리 쓰이는 한 홀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널리 쓰인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국어사전에서 ‘○○의 잘못, ○○지방의 방언’이라는 식의 꼬리표를 달아 죄인 취급을 해서야 되겠는가. 우리말 어휘가 풍성할수록 우리의 문화도 비옥한 옥토 위에서 풍요롭게 발전할 수 있다. 운치 있고 널리 사랑받는 말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복수표준어로든, 예외조항을 두든 그 방법을 두고 우리 모두 고민해 봐야 한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3동 827   ☎ (02) 2669-9721
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