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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의 시 ‘청포도(靑葡萄)’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원
내 고장 七月(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닲은 몸으로/ 靑袍(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靑葡萄’, 「文章」, 1939)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자 생활과 독립운동으로 평생 17회나 감옥에 갇혔고 1941년 중국 북경감옥에서 옥사하였으며 그의 시비가 안동시에 세워져 있다.
  육사의 시 ‘청포도’에서는 뜨겁고 햇볕이 내려쬐는 고향의 이미지인 ‘7월’의 하늘과 바다가 등장한다. 7월이 오면 시인의 고장에는 청포도가 익어가는데, 그 과정은 이 마을의 전설이 포도알 속에 주저리주저리(물건이 어지럽게 많이 매달려 있는 모양) 매달리는 과정이고,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과정이다. 즉 이 고장의 특산물인 청포도는 이 마을의 전설과 꿈의 집합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고장의 전설과 꿈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이 마을의 전설과 꿈은 아마도 시에서 ‘말하는 이’가 간절히 기다리는 어떤 손님의 출현쪽으로 이야기가 모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손님은 바다 건너에서 흰 돛단배를 타고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 전설에는 이 고장을 구할 어떤 영웅이나 귀인이 7월에 바다에서 흰 돛단배를 타고 나타나리라는 예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유사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를 보면 바다로부터 후일 왕이 될 영웅이 등장하는 예를 기록하고 있다. 그 한 예로는 신라 남해왕 때 바다 건너에서 용이 이끌어서 신라 아진포 앞바다에 배 한 척이 나타나자 상서로운 까치소리가 그 배를 에워쌌다고 한다. 이때 ‘아진의선’이란 할머니가 배를 타고 나아가 그 배를 끌어다가 그 안에 있는 궤를 발견하는데 그 궤에는 단정하게 생긴 사나이가 있고 일곱 가지 보배와 노예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궤에서 나온 사나이는 자신이 본래 바다 건너 용성국 왕자임을 밝혔고 후일 신라의 석탈해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황옥 공주가 하늘의 뜻으로 대가야의 왕비가 되기 위하여 바다 건너 멀리 인도 야유타국에서 붉은 빛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하인과 노예와 보물을 가득 싣고 별포 나루에 도착하여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또 서양의 예로는 바그너 오페라의 대본이 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가 있다. 트리스탄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사랑하는 이졸데의 치료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이졸데가 오기를 기다린다. 만일 이졸데가 바다 너머에서 온다면 흰 돛을 달게 하고 오지 않으면 검은 돛을 달라는 말을 했는데, 기다리던 이졸데는 왔으나 질투심을 누를 길 없는 부인의 거짓말로 트리스탄이 죽는다는 비극적이 사랑의 이야기도 있다.
  ‘이 시에서는 7월에 먼 바다에서 청포(靑袍, 조선 시대에, 사품·오품·육품의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으로 입던 푸른 도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시인이 이 시를 쓰던 1930년대는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치하이므로 조선의 관헌은 아닐 것이고,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구할 영웅의 출현을 에둘러서 나타내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이 시에서 말하는 이가 맞이할 영웅적인 손님의 방문은 하늘과 땅이 함께 어울린 크나큰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 핵심어는 ‘열린다’이다.
7월에
청포도가 -----      이 마을 전설이 ----- 하늘 밑 푸른 바다가
열린다
  7월이 오면 하늘로부터는 포도송이를 영글게 할 어떤 강력한 햇볕망이 열리고 하늘 밑 푸른 바다가 열려 청포를 입은 선비(영웅)가 탄 흰 돛단배가 나타난다. 모든 것들이 하늘로부터 예정된 순서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7월’은 말하는 이가 기다리는 어떤 구원의 시기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의 뒷부분에서는 영웅의 출현이 아주 개인적인 만남으로 연결되면서 시 속의 말하는 이가 기다리던 영웅은 긴 여행에 지친 청포 입은 손님으로 구체화된다. 나라를 구할 영웅의 변장한 모습일 수도 있는데 소박하게 보면 고대하던 귀인(貴人)으로 볼 수 있다. 청포 입은 손님이 찾아온다면 그 만남에서 말하는 이는 그와 함께 청포도를 따 먹을 것을 꿈꾸고 있다. 그때의 호사스러운 준비물은 하이얀 모시 수건과 은쟁반이다. 1930년 당시에 은쟁반에 놓인 청포도를 먹으며 모시 수건에 손을 닦는 모습은 가장 귀족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다.
  기다리던 손님이 민족의 영웅이든 개인의 이상적 존재이든 간에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 존재를 만나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 부분에서 말하는 이는 가정법으로 말하고 있나 보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삶을 바꾸어 놓을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순간을 위하여 나머지 인생을 준비하고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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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