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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어스름 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후어 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

벌개눞역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쇠ㅅ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붙으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절인 팔다리에 거마리를 붗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 없는 노친네들은 일어 팟을 깔이며 방요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오금덩이라는 곧」, 『사슴』, 鮮光印刷株式會社, 1936.)

  백석(白石, 1912〜1963)의 시 「오금덩이라는 곧」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간 치료법과 민간 신앙, 속신(俗信) 등이 혼합된 전통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 사람이 ‘생명이 있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나고 자라고 죽는’ 생명의 수레바퀴 속에 자기도 모르게 끼어들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산다는 것 또한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사람이 나고 자라면서 여러 차례 아프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민간 주술 요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 시는 3연으로 나뉘어 있는데, 1연에서는 병치레를 하는 가족이 있는 젊은 부인들이 마을에서 먼 국수당 돌각담에 와서 수무나무에 여귀(厲鬼,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못된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의 귀신)의 모습을 걸어 놓고 나물과 밥도 갖추어 놓고 비난수(귀신에게 비는 소리)하는 주술적인 치료를 행하고 있다. 죽은 뒤 제사상을 받지 못하는 귀신이 해코지를 해서 병이 났다는 사고 방식이다. 백석이 살던 1920, 30년대에는 의원이 드물어 민간 신앙에 의지해서 병을 고치던 주술적 사고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주술로서 병을 고치는 역할은 원래 여성이나 어머니나 아내가 감당하던 일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은 귀신에게 음식을 풀어먹인다는 관습이다. 이 시에서 젊은 아낙네가 비난수하는 말은 바로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 침노 말아라”라고 말한다. 집안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바가지에 밥과 나물을 담아 주문을 걸고 내다 버리면 앓던 아이에 붙어 있던 귀신이 물러가서 건강해진다는 것은 예전에는 일상적인 민간 주술이었다. 그만큼 전통사회의 여성들은 시집간 뒤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가족의 건강까지도 책임지는 의원 노릇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정신력으로 병을 몰고 오는 보이지 않는 귀신과도 맞부딪칠 수 있어야 했다.
  2연을 보면 역시 눈의 부종(浮腫)을 앓는 이를 위해 1연에서처럼 마을에서 먼 벌개늪(뻘건 빛깔의 이끼가 덮여 있는 오래된 늪)에 가서 바리깨(주발 뚜껑)를 두드리며 그 늪에 사는 찰거머리를 붙이는 의료 주술을 행하는 것이다. 거머리가 부종이 난 나쁜 피를 빨아내면 병이 낫는다는, 제법 현대 의학에도 맞는(?) 전통 의료법이 흥미롭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피성한(피멍이 크게 든) 눈숡(눈시울)이나 팔다리가 저린 데에 거머리를 붙여 순환이 안 되어 뭉치거나 나쁜 피를 빨아내도록 하는 의료법을 시행한 것이다.
  3연을 보면 산과 숲으로 둘러싸였던 1920, 30년대에는 마을 가까이 여우가 살고 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현대에는 무섭다기보다 거의 환상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일이다. 요즘은 만화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인데, 사실 우리 민속에서 보았던 여우 울음 소리는 흉사(흉하고 언짢은 일, 사람이 죽는 일)를 몰고 오는 상징적인 의미로 보았다. 민간의 속신에서 여우의 울음은 죽음을 의미하여 “북쪽에서 여우가 울면 그 동네에 초상이 난다”고 하였다. 이 북쪽은 공동 묘지가 있는 북망산을 상징하며, 음(陰)과 암(暗)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우는 무덤을 파서 송장을 먹는다고 하며, 더군다나 북쪽의 여우는 죽음을 뜻한다. 그래서 여우의 울음은 죽음을 알리는 소리로, 저승사자의 출현으로 인식하였다.
  또 밤에 여우가 울면 불길하다고 하였다. 밤은 암흑과 죽음, 귀신과 맹수가 활동하는 궂은 때이므로, 여우의 울음소리는 이런 것들과 부합되어 불길함을 상징하였다. 또 “앞산에서 여우가 울면 부음(訃音)이 들어오고, 뒷산에서 여우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고 믿었다. 앞산은 밝은 쪽이므로, 여우가 죽음을 알린다고 해도 우리 집이나 우리 동네를 벗어나 부음 정도로 그친다. 그러나 뒷산은 무덤이 있는 나쁘고 어두운 곳이므로,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남을 의미한다. 여우의 울음소리는 사신(死神)과 같은 구실을 한다. 특히 환자에게는 이런 의미가 더욱 강하게 인식되었다. 그래서 여우가 몹시 울면 동네의 병자가 죽는다는 속신이 생겼다. 여기서 몹시 운다는 것은 병자를 불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한국문화상징사전』 1, 동아출판사, 472-473쪽)
  그런데 3연에서 재미있는 것은 노친네들이 여우가 우는 밤이면 일어나 '팟을 깔이며'(햇볕에 말리려고 멍석 위에 널어둔 팥을 손으로 이리저리 쓸어 모으거나 펼 때 나는 소리를 말하며, 여기서는 오줌 누는 소리에 비유함) 방뇨를 한다는 일이다. 여기서는 팥을 만질 때 나는 소리를 내며 오줌을 누면, 흉사를 몰고 오는 여우 울음 소리를 막을 수 있다는 암시를 풍기고 있어서 흥미롭다. 1, 2연에서 흉사를 막는 주역이 아내요 어머니였던 것과 달리 3연에서는 남자 노친네들이 한밤중에 나는 여우의 불길한 울음소리에 오줌을 누며 대응한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해학적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노친네들의 방뇨를 통한 흉사 퇴치 방법은 시인 나름의 해석 태도를 보여주는 민간적인 속신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건강을 잃고 불안한 심리상태에 빠져 있는 가족이나, 아프지는 않더라도 한밤중 여우 소리에 불안해 하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는 민간 요법으로 휼륭하다고 점수를 높게 쳐 줄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전통 사회의 여성과 남성들이 가족의 병고를 민간 주술로 어떻게 액막이하고 슬기롭게 헤쳐 나갔는가를 잘 보여주는 민속지적인 기록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