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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몸으로 삶을 살아냄으로써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진득이 앉아 조금씩 자신의 진심을 말하기가 점점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말 잘하는 사람들은 늘 주위의 부러움을 산다. 공식석상이건 사석이건 분위기를 돋우는 말 한마디,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멘트를 던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부러운 능력이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말하기가 더욱 절실하다. 더욱이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집안의 교육 정도나 가풍까지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일부분 진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반대로 말이 인품을 담지 못하거나 아예 인품을 배반하고 숨기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서 말과 행위를 같은 것으로 보는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말 한마디에 모든 걸 거는 걸로 치면 개그를 빼놓을 수 없다. 개그는 그저 우스갯소리이기만 한 게 아니다. 개그도 일종의 언어적 실천 행위이다. 격조 높은 개그는 막무가내로 관객을 웃기지 않는다. 그런 개그는 곧바로 도태된다. 개그는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무성 영화 시절 찰리 채플린이 한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 연기와 동작이 과장되고 소란스러운 희극)는 웃음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고 현실을 담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농담 속에 뼈가 있듯이 개그 속에도 풍자와 저항이 작동한다. 우리나라 개그도 이런 언어적 실천 행위를 충분히 하고 있다.
  개그의 기법 중 고전적인 방법이 반전 개그이다. 관객의 예상을 벗어난 말이나 행동을 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기법이다. 반전 개그는 그 자체가 절묘한 언어적 유희이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언행일치’, ‘명품남녀’, ‘사모님’과 같은 개그 코너들도 기본적으로 반전 개그이다. 이 코너의 재미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 기제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언행일치’는 가족 구성원 간에 나누는 말과 행동을 극명하게 불일치시킴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며, ‘명품남녀’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은 명품족 남녀와 웨이터의 ‘부적절한’ 대화가 중요한 소품이다. ‘사모님’ 또한 자가용 안에서 나누는 사모님과 ‘김 기사’의 말도 안 되는 말놀이가 중요한 플롯이다. 말문이 막히면 콧소리로 ‘운전해’ 하면 그뿐이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웨이터는 손님의 주문을 받고 가면서 ‘좋은 시간 되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노세요’라고 한다. 어떤 때는 ‘계속 노가리 까세요’ 하며 돌아선다.
  이러한 개그는 ‘대화의 격률’을 보기 좋게 어기고, 언어적·사회적 맥락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표면적 언어 속에 숨겨 있던 현실을 드러낸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났느냐는 사람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말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 소통하는지를 언어체계 속에 반영한다. 낱말의 선택, 높임법, 말의 양과 길이를 적절히 조절한다. 억양에도 ‘사람과 장소 관계’가 반영된다. 이러한 적절성을 의도적으로 일탈할 때 웃기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그는 언어적 맥락의 파괴를 통해 말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시대를 무의식적으로 조롱한다. 겉으로 보기에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사람들이 내뿜는 부조리한 말과 저열한 행동은 개그의 대상이 된다. 외제차를 타고 값비싼 옷을 입은 사모님에게 귀족적 우아함이 없을 수 있고, 명품과 고급요리를 즐길 것 같은 엘리트들의 대화도 천박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개그는 현실의 모순을 희화한다. 기득권층이 누리는 우아함, 그럴듯함, 격조 높음 뒤에 숨겨진 천박함을 고발한다. 개그는 기득권층, 또는 부자를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서 왜 기득권층이 개그의 먹잇감이 되는지를 더듬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현행 종합부동산세(종부세) 과세 기준에 따르면 공시가격 6억 원 이상으로 종부세 부과대상인 주택은 약 16만 가구로 전체 주택의 1.2%에 불과하다. 이 법을 고쳐 과세 기준을 9억 원으로 올리자는 야당의 법안대로라면 종부세 부과대상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개그가 아니라면 이런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 아니면 국가가 걷는 세금은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김 기사에게 어이없는 일을 시키는 사모님의 요구는 역설적이게도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싶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정치권의 모순 형용은 이런 개그를 닮아가고 있다. 대통령이 만든 표현 중에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표현이 있다. 진정한 모순 형용이다. 실제로 그의 말은 (약간) 좌파적이었고, 행동은 (대부분) 자유주의적이었다. ‘친미 자주’라는 말도 만들었다. 친미적이면서 자주적일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자주적으로 친미한다’는 것이 어떤 상황을 가정한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다 보니 보수 문필가 한 분은 ‘진보 우파’라는 웃긴 말로 대응을 한다. ‘(신)자유주의’가 좌파와 조우할 수 없듯이, ‘진보적인’ 우파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앞에 ‘진보’나 ‘자주’와 같은 파격적 개념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자신들의 행위, 노선, 태도, 세계관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개정 사학법 반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등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진보’라는 헌사는 부당하다. 이렇게 말이 행동을 배반하고, 행동이 말과 따로 놀게 되면 결국 말의 힘, 말의 가치를 핍절하게 만든다. 진심이 담긴 말, 묵묵히 거듭되는 실천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 된다.
  우습게도 모순 형용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과 반대의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곧 말은 자유주의적으로, 행동은 좌파적으로 하는 정부, 말은 친미적이지만 행동은 자주적으로 하는 정부, 말은 보수적이지만 행동은 진보적인 시민 단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상황도 나타나야 ‘언행 불일치’가 하나의 정치적 전략, 고도의 수사학일 수 있다는 사회적 추인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개그가 보여주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는 유쾌한 웃음을 자아내지만, 현실 속에서 목격되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는 역겨움과 냉소만을 낳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말과 행위, 주장과 실천을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알튀세르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이 말이 아닌 행위(실천)를 ‘최종심급’으로 삼아야 한다. ‘네모난 동그라미,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 형용이 난무하는 시대는 더더욱 행위(실천)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행위 속에 진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