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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현보(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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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수선하였다. 이태 전 2005년 12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드는 개정안이 통과되던 날도 그랬다. 종합부동산 세법 개정안이 강행 처리되어 여야가 밤새 대립하여 몸싸움을 벌이고 사립학교법 상정을 막느라고 아수라장이 되었던 그날, 뉴스감도 되지 않는 듯이 이튿날 늦게야 스멀스멀 한글날 국경일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에도 그랬다.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일이 된 한글날을 맞이하여 살뜰히 준비한 행사가 아침부터 잘 치러지기를 바라며 분주하던 손길은 새벽부터 쏟아져 나온 ‘북한 핵실험 성공’이라는 메가톤급 소식에 또 찬물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다 국경일답지 않게 공휴일도 아니고 방송이나 신문에서 내로라할 기사나 말 한마디 없으니 꼭 독립투사들이 밀지를 들고 상해임시정부로 숨어가는 모양 사람들 눈치를 보아야 했다. 더욱이 한글날은 한동안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그거 원래 국경일 아니었어? 기념일인가?”할 정도로 무심한 눈길이 역력하였다.
올해 들어선 침통하기까지 했다. 경기도에서 영어마을을 만들고부터 나라 안은 온통 영어마을, 영어특구, 영어도시, 영어 공용 국제도시들로 도배를 한 듯하였다. 이럴 바에야 한글날은 뭐하려고 국경일로 만들었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사실 이런 반응은 정부가 한글날을 없앤 1990년부터 15년이란 세월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결과로서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말을 소중히 여기며 목숨처럼 아끼는 많은 사람과 단체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고 국회의원들도 들고일어나 국회 이름패를 한글로 바꾼다든지 한자나 영어로 써진 간판이나 문구들을 고치라고 부추기며, 여러 정부기관에서는 법조문이나 행정용어들을 한글로 쓰거나 순화하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면서 한글날을 국경일로 하는 법안을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몇 해 전부터는 한류 열풍 속에서, 오히려 나라 밖에서 한글이 더 인기를 얻고 있다.
작년에 한글날 행사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던 나는 지난 5월 국립국어원에서 열린 한글날 행사의 방향을 논의하는 회의에 한글단체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국어원장께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올해 한글날 행사를 한글학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외솔회가 공동 주최하도록 결정하였다. 이날부터 이 세 단체는 단체장과 실무자들이 모여 한글회관에다 사무실을 열고, 이름을 ‘561돌 한글날 대한민국 큰잔치 조직위원회’로 지었으며, 행사 큰 주제를 ‘한글, 날아오르다’로 정하였다. 행사 준비를 위해 내가 알기로도 20회 이상의 집행위원회를 열었고, 자치단체나 협력업체들과 30여 회가 넘는 모임을 열면서 얼개를 짜고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세 단체장과 국어원장이 공동 조직위원장을 맡아 주최하고, 조직위원회가 주관하며, 그 집행위원장에는 차재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부집행위원장은 유운상 한글학회 사무국장이, 감사는 박대희 외솔회 총무이사가 맡도록 결정되었다.
우리 집행위원들은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새롭게 끌어올리고 국경일이 된 한글날을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과 더불어 치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가장 먼저 풀어야 할 숙제로 삼았다. 그러니 좀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와, 접근이 손쉬운 열린 공간, 가슴에 와 닿는 소재와 어울릴 수 있는 공감대를 찾는 일이 급선무였다. 수십 가지의 행사들을 쏟아내고 그것을 다시 정리하였으며, 세종로를 중심으로 장소를 찾은 결과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으로 결정하였다. 낮부터 밤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대상에 맞춘 행사를 시간대별로 꾸미는 한편, 한글의 소중함과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리면서 역사성과 과학성, 전통미를 옹골차게 아우르는 가무와 전시회, 거기에다가 세계화와 미래지향성까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야심에 찬 행사를 준비해야 했고 또 그렇게 되도록 꾸며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0월 9일은 경복궁이 쉬는 날이었다. 그리고 화요일이니 주중에 행사를 치르면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결국 행사를 10월 6일 토요일과 9일 당일 행사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 토요일 경복궁에서는 훈민정음 반포 재현식과 세종로 거리 어가 행렬을 치르게 되었는데 정말 많은 시민들이 와주었고, 거리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남대문에서 마무리 지을 때는 만장 기와 색동 옷을 입은 어린이, 그리고 어가 행렬이 어우러져 잔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리는 아파도 가슴은 뛰었고 먹는 김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를 만큼 정신없었지만 내심 뿌듯했다. 멀리 미국에서는 그동안 함께 준비하였던 뉴욕 브로드웨이 세종대왕 어가 행렬도 이날 치러졌다.
참으로 받아놓은 날은 빨리도 왔다. 9일 오전까지만 해도 광화문 네거리와 그리 멀지 않은 서울역사박물관이어서 많은 관객들과 함께 행사를 치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저 멀리 한글회관 옥상에서는 대형 풍선과 “한글, 날아오르다”라는 문구 선명한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리며 분위기를 돋우었고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방패연들은 박물관 마당을 수놓고 있었으며, 농악대와 청사초롱은 어우러져 장터처럼 시끌벅적하였다. 갑자기 외국인 학생들 수백 명이 떼 지어 몰려와 앞마당에서 한글 쓰기 대회에 참가하니 많은 기자들이 예쁜 아라비아 아가씨를 찍으려고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글 낱자를 높이 3미터나 되는 대형 입체 목판으로 만들어 마당에 전시하고 한글운동가 33인 사진과 제주도 말 붓글씨가 걸리면서, 한쪽에서는 120미터나 되는 천에 붓으로 훈민정음 서문을 쓰는 몸짓(행위예술)이 벌어졌고, 훈민정음 목판을 손수 찍어보려는 인파는 끝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아이들은 한글을 새긴 풍선을 받아 들고, 공책에 한글을 수놓기도 하고 부모와 줄지어 가훈 써주는 어른 앞에서 공손히 마음을 조아리기도 하였다. 낮은 이렇게 그런대로 성공한 잔치였다.
일은 저녁으로 접어들면서 벌어졌으니 때 아닌 북풍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갑자기 추운 바람과 한기가 들이닥쳐 시민들은 집으로만 발길을 재촉하느라고 오백여 석이나 되는 의자는 매워질 줄을 몰랐다. 북춤, 장구춤, 개그맨의 입심도, 연예인의 매혹적인 노래도, 나눠주는 멋진 한글 무늬 옷도 그들을 불러 모으는 데는 역부족이었으니, 무대는 시간이 갈수록 썰렁해지고 주최 측 어르신들은 미안함에 끝까지 자리를 채워야만 했다. 사실, 준비한 배우들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시민들의 외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신들린 사람들처럼 온몸을 불사르며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계속해 주었다. 그리고 그 후 23일과 24일에 수천 명의 관객을 몰고 온 세종대왕 창극 <성왕의 낙원>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공연을 보고 가시던 한 일행이 내년에도 꼭 다시 보고 싶다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었는데, 그 말은 몇 달 동안 내내 조바심하던 가슴을 한순간에 녹여준 참으로 고마운 한마디였다.
이 밖에도 학술대회나 지방마다 많은 행사가 있었다. 그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준비하고 한글날을 위해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 중국과 몽골에서도 행사가 있었고, 뉴욕에서도 있었다. 물론 미국 시카고대학 매콜리 교수께서는 올해도 한글날 파티를 열었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한글날은 지구촌 각지에 흩어져 사는 모든 한겨레의 축제일이며 경축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날일 것이다. 앞으로 한글날 행사는 미리미리 장소를 물색하여 정말 꼼꼼하게 정성껏 준비하여 시민에게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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