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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방충망으로 꽁꽁 막혀 있는 사무실 커튼 위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손바닥만 한 나방이 붙어 있다. 뭘 없애(=죽여)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깔이라 저걸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이다. 죽이기엔 그 생명이 안쓰럽고, 그냥 두자니 종일 방해를 할 것이다. 스스로 적당히 타협을 한다. 휴지로 살짝 싸서 밖으로 다시 날려주기로.
   두루마리 휴지를 두 바퀴 돌렸다. 단박에 잡아야 한다. 너무 세게 잡으면 눌려 죽을 것이고, 너무 살살 잡으면 가루를 온 방에 뿌리며 난리를 칠 것이다. 적당한 힘 조절……. 성공이다! 한 번에 나방을 잡았다. 후닥닥 뛰쳐나가 주먹을 편다.
   아, 그런데 이 얼마 만에 느끼는 생명의 몸부림인가. 잡았을 때의 그 낯선 느낌. 그건 생명의 꿈틀거림, 흔들림, 떨림에 대한 낯섦이다. 비가 오면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지렁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열심히 길을 떠나는 개미, 따뜻한 봄볕에 졸고 있던 병아리, 창호지처럼 얇게 전율하던 잠자리,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꽉 잡히는 개구리, 손바닥 사이에서 가늘게 퍼덕이던 송사리, 여물을 되새김질하며 질질 침을 흘리던 누렁소…. 어릴 적 다른 생명체들은 그렇게 낯설지 않게 우리 손을 드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들수록 다른 생명체를 ‘잡아’ 본 적이 별로 없다. 이제는 그들이 너무 낯설다. 낯설 뿐만 아니라 두렵고 피하고 싶고 더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모기, 파리는 신문으로 팍 ‘쎄려잡고’, 그렇게 좋아했던 강아지들도 그냥 발로 밀어낼 뿐, 그 꿈틀거리는 생명을 손으로 직접 만지려 들지 않는다. 이물감이 불편해서일까? 아무래도 구체적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이 도시로 스며들고 나서 점점 더 추상적으로 살게 된다. 도시는 추상성이 범람하는 곳이다. 추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다. 붕 떠 있다. 모든 사건과 정보는 화면을 통해 전달되니 직접 뭔가를 대면하는 것이 도리어 뜸하다. 추상적으로 사니 역설적이게도 세상 근심이 모두 내 근심이다. 모두의 문제가 내 문제이고, 모두의 문제를 풀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산다는 건 아무도 위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모든 걸 감싸 안을 수 없으면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추상이 주는 환락일 뿐이다.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위한다’는 혼연일체의 꿈은 진정 아름답지만 하나가 하나만을 깊고 깊게 위하는 것도 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서도 안 되겠지만, 구체적인 생명의 꿈틀거림을 내 손 끝으로 직접 만지지 않으면 그건 그 아무것도 구하지도,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이 책에는 의성·의태어가 많이 나온다. 병아리는 ‘삐악삐악’, 강아지는 ‘멍멍’, 송아지는 ‘음매’, 호랑이는 ‘어흥’, 오리는 ‘꽥꽥’, 개구리는 ‘개굴개굴’, 매미는 ‘맴맴’……. 그러면 기차는 어떤 소리를 낼까? 고속 전철이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시대이지만, 어린이 책에는 여전히 증기 기관차 소리인 ‘칙칙폭폭’이다. ‘칙칙폭폭’이 아닌, 사회적으로 인정된 새로운 의성어가 아직 없다. ‘둥둥 탁탁, 둥둥 탁탁’ 하며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보지만 결국 그냥 쓴다. 언어는 사물을 뒤로 숨기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들리는 소리는 언어 때문에 뒤틀려 들린다. 그래서 여전히 기차는 ‘칙칙폭폭’이다. 지금 세 살 난 우리 애도 기차는 칙칙폭폭 달린다. 사회적 경험의 축적물인 언어는 사람이 세계를 파악하게 하며 고등 생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면서도 언어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구실도 한다.


   

   요즘 동물원이나 수목원, 미술관, 박물관에 가보면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옛날엔 설렁설렁 무덤덤하게 지나쳤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엄마 아빠가 줄기차게 설명을 하고 아이들은 그걸 공책에 받아 적는다. 예전에 비해 자상해진 엄마 아빠는 식물원에 가면 나무와 꽃 이름, 그것의 생태, 특징, 모양새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들은 동물원 우리 앞에 쓰인 안내문을 보며 ‘저게 이름이 뭐구나’라고 한다. 아이가 꽃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렇게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사물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 이젠 언어 없이는 세상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의 ‘하나의 몸짓’을 온몸으로 느낄 기회가 사라진다. 나에게 어떤 이름의 꽃이 되기 전에 그것의 촉감, 냄새, 소리, 맛을 경험하지 못한다. 기차가 내는 진짜 소리, 매미가 내는 진짜 울음소리를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지식은 쌓이지만, 자연과의 대화를 통한 경험은 쌓이지 않는다. 이름을 외우고,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줄 알기 위해 자연으로 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 ‘이름’과 ‘분류’와 ‘특성’을 되뇌는 것만이 아이들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름은 ‘이름표’에 불과할 뿐이며, 이름 너머에 있는 사물과의 대화는 단절된다. 이름을 통한 간접 경험의 과잉은 아이들의 지식량을 늘릴지는 모르지만, 사물과의 대화와 놀이로 얻게 될 몸의 언어를 상실한다.
   언어는 과거의 축적물이다. 언어는 새롭기보다는 상투적이다. 지금 당장 만들어진 물건이나 솟구치는 생각을 오롯이 담기 어렵다. 그것을 조금씩 흔들어 새로운 언어로 변모시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태생적으로 언어는 고루한 그릇이다. 이름 모를 꽃에 이름을 붙여준다고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 모를 꽃을 만지고 동물들과 함께 놀 때 진정 몸에 박히는 의미로 남는 것이다.
   어느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언어의 상투성을 뛰어넘어 스스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라고 아이들을 농장이나 동물원에 데려가서 동물들이 내는 ‘진짜’ 울음소리를 받아 적어 보게 한다고 한다. 우리도 동물원에 가서 “저게 호랑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가만히 있어 보면 어떨까. 아이들은 곧 호랑이의 크르렁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들판에 핀 꽃을 아이에게 “저건 해바라기야”라고 말하지 말자. 그 냄새를 호흡하며 노란 잎들의 보드라운 촉감, 원을 그리며 촘촘히 박힌 씨들의 규칙성, 솟대처럼 뻗은 줄기를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부터 더욱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은 줄이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