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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 시 ‘無等을 보며’
김옥순(金玉順) / 국립국어원
  가난이야 한낱 襤褸에 지내지 않는다. /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 여름 山같은 /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 午後의 때가 오거든 /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 더러는 앉고 /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 일이요 /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서정주, ‘無等을 보며’, 『서정주시선』, 1955)

  미당 서정주의 시 ‘無等을 보며’는 전라남도 빛고을 광주(光州)에 있는 무등산(無等山)을 보며 쓴 시이다. 무등(無等)은 산 이름이기도 하면서 불교 용어로 부처님의 존호를 말한다. 부처님은 최상의 어른이시라 견줄 이가 없고, 세간 중에서는 이 무등한 부처님과 같을 이가 없으므로 무등등(無等等)이라 한다.
  이 시는 ‘가난’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가난을 남루(낡아 해진 옷)로 비유할까? 1연을 보면 가난은 해진 옷과 같아서 우리 몸을 다 가릴 수 없으며, 해진 옷 사이로 원래 타고난 여름산 같은 살결과 마음씨가 삐져 나온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그래, 건강한 아이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어도 보기 좋고 귀티가 나듯이 타고난 건강한 살결이나 건강한 마음이 있으면 가난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구나 하고 이해하게 된다. 해어져 떨어진 옷도 ‘벗고’ 가난도 ‘벗는다’. 그래서 흔히 ‘가난을 벗는다’라는 말을 한다.
  1연 1행에서 무등산의 자태는 갈맷빛(짙은 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가난도 어쩌지 못하는 건강한 장년(壯年)의 여름산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가난은 부정적인 말투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2연 1행에서도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라는 부정적인 말투를 통해 더 이상 물러설 길 없는 부모의 굳은 결심을, 즉 가난에 따른 자녀 교육의 어려움과 각오를 말한다. 시인은 무등산이 그 푸른 무릎 아래 지란(芝草와 蘭草)을 기르듯 자녀를 그렇게 길러야 함을 유교적 상징으로 암시하고 있다. 『공자가어』에서 “지초와 난초는 숲속에서 자라나,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향기를 풍기지 않는 일이 없고, 군자는 덕을 닦고 도를 세우는 데 있어서 곤궁함을 이유로 절개나 지조를 바꾸는 일이 없다”, “착한 사람과 함께 살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간 것처럼 오랫동안 그 향기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지초와 난초를 ‘군자’와 ‘착한 사람’에 대응시키는데 바로 시인도 군자가 곤궁함을 이유로 지조를 바꾸지 않듯이 그렇게 자녀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즉 부모가 가난하더라도 자존심을 가지고 품위 있게 살면서 자녀를 가르쳐야 함을 말하는 듯하다.
  다시 2연에서는 곤궁하고 힘든 시기를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 午後의 때가 오거든”이라고 말하면서 흐르는 물길로 인생을 비유하고 있다. 목숨이 농울쳐 (물결쳐 돌아흐르는) 휘여드는 위험한 순간을 당하더라도 내외간에는 앉고 눕거나 3연에서처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이마라도 짚어 주는’ 끈끈한 부부애를 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4연에서는 어려운 고난의 시절이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로 비유되는데 그 비유는 저 멀리 향가의 ‘모죽지랑가’에 닿고 있다. 즉 ‘모죽지랑가’에서 작자는 죽은 죽지랑을 회상하면서 그가 가 있을 피안의 하늘을 그리워하는데, ‘다북쑥 우거진 굴헝’은 이러한 상상적 세계와 대비되는 속세에서의 고통과 시련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시인은 속세의 고통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 일이요 /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힘든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등산과 사람의 모습이 서 있는 자세에서 점점 앉고, 눕는 자세로 바뀌는 비유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등산 사람
갈맷빛(짙은 초록빛)여름 산 등성이 ----- 남루한 옷 속에 건강한 살결과 마음씨를 드러내고 서 있는 장년
청산이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른다 ----- 가난 속에서도 엄격하게 자녀를 길러야 한다.
산의 물길이 물결쳐 돌아흐르는 모습 -----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순간
산의 옥돌(귀한 돌)로 묻혔음 ----- 가시덤풀 쑥구렁(시련과 고통)
옥돌에 청태(푸른 이끼)가 끼다 ----- 속세의 고통으로부터 거리를 두다

  위의 비유를 통해서 사람이 시련을 견디어 가는 비법을 조곤조곤 알려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가난을, 2연에서는 자식 기르기의 어려움과 목숨의 위태로움을, 4연에서는 시련과 고통을 말하면서 삶을 견디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보여준다. 산은 그 모든 시련을 편한 자세로 맞이하라고 충고한다. 서 있지 말고 앉거나 바라보거나 이마를 짚거나 나중에는 시련이 밖에서 못 알아 보게끔 푸른 이끼까지 낀 옥돌이 되어 있으라고 충고한다. 지금은 가시덤불 쑥구렁에 묻혀 있더라도 자신의 모습을 푸른 이끼 낀 옥돌로 산에 묻혀 있다고 생각하라고 말한다. 요즈음같이 경제적으로 힘든 때 부처님의 화신인 무등산의 옥돌이 되어 시련을 견디라는 시인의 멋진 충고가 더욱 새롭게 느껴진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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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