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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 순화
   ‛춘희(椿姬)’와 ‛소공녀(小公女)’
박용찬(朴龍燦) / 국립국어원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란 오페라가 있다. 프랑스 작가 뒤마(Dumas)의 소설 “La dame aux camélias”를 소재로 하여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Verdi)가 작곡한 오페라다. 병든 창녀인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우리에게 “춘희(椿姬)”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춘희(椿姬)”는 ‘춘(椿)’이 동백 춘 자이고 ‘희(姬)’가 아가씨 희 자이니 풀어 보면 ‘동백 아가씨’ 또는 ‘동백꽃 여인’란 뜻이다. 이 오페라가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됐을 때 “동백 아가씨” 또는 “동백꽃 여인”이란 제목이 즐겨 사용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비올레타가 가슴에 항상 동백꽃을 달고 나오기도 하거니와 이 오페라의 원작인 “La dame aux camélias”도 그런 뜻을 갖는 데 따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오페라의 제목으로 “동백 아가씨” 또는 “동백꽃 여인”이라 하는 것은 별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동백 아가씨’, ‘동백꽃 여인’ 등과 달리 ‘춘희(椿姬)’라 하는 데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춘희’가 이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 대부분의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낯선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사람 이름이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춘희’의 ‘춘(椿)’을 나무목(木)이 없는 ‘춘(春)’, 즉 봄 춘 자로 잘못 봐서 ‘봄 여자’로 알기도 한다. 특히, 후자는 우리말에서 ‘춘정(春情)’이나 ‘매춘(賣春)’처럼 봄 춘(春) 자가 다소 그런 의미를 갖기도 하거니와 여주인공인 비올레타의 직업이 ‘창녀’라서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우리에게 낯선 한자로 그리고 다소 생소한 방식으로 조어된 일본식 한자어인 ‘춘희(椿姬)’에서 비롯된 것이다. ‘춘(椿)’ 자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한자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춘희’란 말은 사실 일본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일본식 한자어다. 그런데 일본어에서와 달리 적어도 현대 우리말에서는 ‘희(姬)’가 일부 한자(어) 뒤에 쓰여 ‘아가씨’, ‘여성’의 뜻을 더하는 말로 쓰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를 굳이 번역해 쓰고자 한다면 일본식 한자어를 쓴 “춘희(椿姬)”보다는 “동백 아가씨” 또는 “동백꽃 여인”라 하는 편이 좀 낫다. 그러나 이 또한 “춘희”를 직역한 느낌이 들어서 왠지 꺼림칙하다. 차라리 이탈리아 어 제목의 원뜻을 고려하여 “방황하는 여인”, “길 잃은 여인”, “타락한 여인” 정도로 하는 게 훨씬 나아 보인다. 물론 ‘여인’은 ‘아가씨’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 “소공녀(小公女)”를 하나 더 들 수 있다. “소공녀”는 미국 작가 버넷(Burnett)이 지은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으로 쓰고 있는 ‘소공녀’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이전에 같은 작가가 지은 소설 “소공자(小公子)”의 자매편 성격을 띠는 것이라 ‘소공자’의 상대되는 말로 대충 짐작될 뿐이다.
   이 작품의 원제목은 “Sara Crewe or What Happened at Miss Minchin's”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A Little Princess”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1903년 연극으로 각색할 때 새로 바꾸어 단 제목이다. ‘소공녀’는 바로 이 제목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대일 직역하여 새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말이다. “A Little Princess”를 “소공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는 이 소설이 이전에 번역한 “소공자(小公子)”(원제목은 Little Lord Fauntleroy)의 자매편 성격을 띠는 것이란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소공녀’의 ‘소(小)’는 ‘little’에 대응하여 번역한 것이므로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공녀(公女)’는 다소 문제가 있다. ‘지체가 높은 집안의 나이 어린 아들’을 뜻하는 ‘공자(公子)’는 우리말에 있지만 ‘지체가 높은 집안의 나이 어린 딸’을 뜻하는 ‘공녀(公女)’는 우리말에 없는 일본식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소공녀”가 쉽게 이해되지 않은 것도 다 이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제목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본식 한자어 ‘공녀’가 포함된 “소공녀”로 하기보단 영어 제목 “A Little Princess”를 고려하여 “어린 공주”라 했어야 했다. “어린 공주”,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제목인가?
   이렇듯 지금까지는 “춘희”, “소공녀” 등처럼 음악, 문학 등의 작품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일본에서 한자어로 번역하여 쓴 작품명을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일본어로 번역된 작품을 다시 우리말로 중역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아직도 일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잘못된 관행에 따라 작품의 제목으로 우리말에 없는 일본식 한자어를 가져다 쓰고 있다. 앞으로 새로운 외국 작품을 소개할 때 적어도 제목만이라도 어려운 일본 한자어를 함부로 가져다 쓰지 말고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을 살려 썼으면 좋겠다.
월간 · 비매품   발행_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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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題字): 송은 심우식(松隱 沈禹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