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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려(청주 상당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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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의 벌어진 앞여밈 속으로 휑하게 들어오는 찬바람에 가슴 속까지 선뜻한 걸 보니 한 해를 마무리 할 때가 되긴 되었나보다. 논술이다 뭐다 해서 더욱 심란해진 학교에서는 다들 학년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일 년 동안 함께 정을 나누었던 반 아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벌써 섭섭하다. 그중 이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한 아이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민주, 영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친구이다. 3월 3일 입학식이 끝나고 교실에서 반 아이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첫 대면을 한 후 막 종례까지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왔는데 누가 교무실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왔다. “저, 선생님, 제가 꼭 부탁이 있는데요, 저 그거 학비 지원 받는 거 꼭 받아야 하거든요, 그거 꼭 제가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저 그거 못 받으면 큰일나요.”
요약하자면 아버지는 60살이 넘으셨고, 어머니도 60살이 다 되어가시는데, 엄마가 아파트 청소일을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워 꼭 학비 지원이 받고 싶다고.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너무 힘들고, 자기가 미안해서 학교를 못 다닌다는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하나나 둘밖에 안되기 때문에 어려운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런 형편을 드러내기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형편이 어렵지만 아이가 기죽을까 봐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부모도 매년 한 둘은 꼭 있으니 민주는 입학식 첫날부터 내게 참 강한 인상을 주었다.
민주는 어렵지 않게 학비 지원과 중식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매우 밝고 꾸밈이 없는데다, 말하는 것이 약간 어눌해서 반 아이들이 맹구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도(우리 반은 여학생반이다.) 그 별명을 오히려 좋아하며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수업을 하는데 교실에서 심상치 않은 기름 냄새가 났다. 난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근원지를 찾았고, 민주 옆에 있는 커다란 쇼핑백이 냄새의 범인임을 알아냈다. 얼마를 실랑이 한 끝에 열어본 쇼핑백에는 호박, 고추, 파 등의 야채를 넣고 막 부친 듯 아직 따뜻한 부침개가 꽤 많이 들어있었다. 그 날은 아침 수업이 있는 날이라 애들이 아침을 못 먹고 왔을 거 같아서 애들이랑 먹으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침개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고. 요즘 어느 여고생이 친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새벽에 부침개를 부친단 말인가. 어쨌든 그날 아침은 반 애들 모두가 부침개로 요기를 했다.
여름방학에 우리 반은 정동진으로 밤 기차를 타고 가는 학급 여행을 계획했다. 옆 반으로 소문나면 못 간다는 나의 공갈 협박에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비밀을 지켰는데, 그 때 나는 여고생들의 입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007작전과도 같은 학급 여행을 애들과 함께 하면서 행복에 젖었다. 너무나도 기다리던 여행 날이 되었다. 한껏 뽐을 내고 기차역으로 나타난 애들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사복 차림이 귀엽고 우스웠다. 뒤늦게 민주가 왔는데, 여행 가방 외에 커다란 쇼핑백을 하나 더 들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무슨 막노동이라도 하고 온 아이처럼 땀범벅이 되어서 나타났다. 너 무슨 일이 있냐고, 혹시 가출했냐고 반 아이들이 저마다 놀리며 한마디씩 했으나 민주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이들은 기차 한 칸을 통째로 전세 낸 듯 올라타서는 밤 기차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권리를 비로소 얻어낸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광하였다. 아마 그 때쯤이었다. 예의 그 심상치 않은 기름 냄새가 기차 안에 퍼진 것은. 이번에는 그 냄새의 원인이 민주가 들고 온 커다란 쇼핑백이라는 걸 너무 쉽게 알아냈다. 밤새도록 기차타고 가려면 심심하고 출출할까 봐 엄마를 졸라서 부침개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어둠을 가르는 낭만적인 밤 기차에서, 40명의 아이들이 무릎에 종이접시 하나에 부침개 한 장을 놓고 나무젓가락으로 먹는 모습을. 그러나 그 우스꽝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
보충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서 부침개를 해 달라고 졸랐을 민주와, 소리소리 질러가면서도 딸의 친구들을 위해서 그 무더운 여름날 불 앞에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 가며 40장이 넘는 부침개를 부쳤을 민주 엄마의 마음이 부침개의 감칠맛에 전해져왔다. 더구나 그 집 형편에는 재료비도 만만치 않았을 걸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 나누며 더불어 산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민주는 내게 너무도 귀한 선물을 했다. 자모회는 도대체 뭐하는 건지도 모르며, 아파트 청소하시느라 학교 한번 찾아오지 못하시는, 그래서 일 년이 다 가도록 담임 얼굴조차 모르지만 딸 친구들을 위해 부침개를 부치시는 민주 어머니와 베푸는 게 뭔지를 이미 체득하여 알고 있는 민주가 있어서 그래도 아직은 우리들의 학교가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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