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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대학과 광고가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1970~1980년대만 해도 대학 광고는 기껏해야 연말에 나오는 수험서에 쪽 광고 크기로 여러 대학이 다닥다닥 붙어서 실렸다. 요즘에는 평소에도 라디오,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잡지, 버스, 지하철 등 ‘매체’라고 부를 만한 곳이면 어디든 대학 광고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돈의 힘이랄까, 반복의 힘이랄까, 대학 광고는 더 이상 촌스럽지도 않다. 유명 상품 광고와 다름없는 세련된 카피와 매력적인 도안과 색상으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인위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대학 광고 또한 교육 소비자들에게 교육 상품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대학 4년과 이후의 자기 인생이 그럴듯한 이미지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한국의 대학 홈페이지는 공통점이 있다.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 대학과 외국 대학의 홈페이지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한국 대학의 홈페이지는 역동적이다. 아름다운 교정, 모델처럼 수려한 학생, 연구에 열중하는 교수의 모습을 플래시로 만들어 대문에 달아둔다. 한국 대학의 홈페이지가 인터넷 신문처럼 수시로 바뀌는 역동적인 구성이라면 외국 대학의 홈페이지는 대학 마크에 텍스트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밋밋할 정도로 정적인 구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동(動)과 정(靜)의 차이는 해당 국가의 인터넷 ‘문화’의 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의 태생적인 ‘깊이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국·공립, 지역, 재단을 불문하고 어느 대학이나 반드시 달아두는 ‘모토’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세계의 유수한 명문 대학의 홈페이지를 가보면, 그 어느 곳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호로 정리하지 않는다. 유독 한국의 대학들만이 구호의 제국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각 대학이 심혈을 기울여 골라 달아 놓았을 모토를 한번 보라. ‘21세기 한국의 미래’, ‘00비전 2020 세계 속에 자랑스러운 00’, ‘Global Pride’, ‘Origin Unique future - vision 2010’, ‘Future 00’, ‘initiative’, ‘세상을 바꾸는 부드러운 힘, 세계 최고의 리더십 대학’, ‘색깔 있는 대학 푸른 꿈을 펼치는 대학. 매력 00, 다이내믹 00’, ‘세계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창조적인 대학, 생산적인 대학, 자랑스런 대학’, ‘Powerful 60년, Global 100년’, ‘감동을 주는 대학, 미래를 여는 대학’,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속의 명문대학’…. 대학 이름만 빼면 어디가 어디인지 모를 것이다. 한 달씩 돌려가면서 써도 별다른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다.
  뜬구름을 잡는 구호는 그 누구에게도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대학의 모토에 따라 대학이 운영되고 있는지 물어보라. 하다못해 대학의 교훈이나 건학 이념에 충실하게 학교가 운영되는지 물어보라. 아마 거의 대부분 고개를 젓거나 실없는 사람 쳐다보듯이 웃을 것이다. 쥐어짠 듯한 구호는 구성원들을 호명하기는커녕 기억에 남겨지지도 않는다. 교내 문제로 몇 년째 내홍을 겪고 있는 어느 대학의 홈페이지에는 공허하게도 ‘변화를 꿈꾼다면, 변화의 시작은 00과 함께’라고 되어 있다.
  각 대학에서 걸어놓은 모토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마 ‘미래’와 ‘세계’일 것이다. 미래, 참 좋은 말이다. 세계, 참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학이 말하는 미래와 세계는 진정 현실감이 있는 것인가? 현실의 문제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으로서의 미래인가? 아니면 비현실적이므로 아무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런 미래인가? 현재 자신들의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있는가? 모순을 직시하지 않은 미래는 희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보라. 다른 것을 보지 말고 현실을 보라. 흔히 대학 구성원을 ‘가족’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가족의 현실을 보라. 학자금 때문에 편의점이나 선술집에서 밤새 ‘알바’를 하는 학생들의 현실, 수도권의 귀족 자제들이 대학을 접수하여 지방 개천에서 난 ‘용’들을 찾아보기 힘들어 버린 현실, 대학 교육의 반 이상을 담당하면서도 전임 교수들의 1/4~1/20의 임금만으로 연명하는(그것도 8개월 동안만!) 시간 강사들의 현실, 도제적 관계에서 오직 행운처럼 올 신분상승의 미래를 위해 숨죽여 사는 대학원생들의 현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용역이라는 이름으로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대학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라. 그들을 배제시킨 미래와 세계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하고 불의하고 비현실적인가.
  입시학원에서 만든 배치표나 사회적 통념 속에서 존재하던 대학 서열은 이제 각종 평가집단에 의해 ‘공개’된다. 대학들은 등위 안에 들기 위해 경쟁한다. 입시철 동네 학원에 나부끼는 합격생 명단처럼 ‘대학평가 전국 0위’, ‘00학과 최우수학과 선정’, ‘BK(Brain Korea) 21 사업단 선정’, ‘GK(Global Korea) 사업단 선정’ 등을 알리는 펼침막이 나부낀다. 한국 대학은 어느새 서열화된 학벌 사회의 공범이 되었고, 자본주의적 경쟁 메커니즘의 충실한 재생산 라인이 되었다. 과시와 포장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작은 실적이라도 어떻게 부풀릴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자기 대학의 교훈에 담은 내용을 끈질기게 실천하려는 학교를 잘 보지 못했다. 현실과 미래가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는 꼴을 보지 못했다. 하여 오직 혁명적인 천지개벽과 개과천선의 상황을 꿈꾸지 않으면 도저히 성취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각 대학의 모토를 내릴 것을 정중히 요구한다. 지금 대학 교정에 켜켜로 쌓인 문제들을 외면한 채 세계적 대학, 세계 100위권 대학이라는 구호는 이미지 조작일 뿐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갖가지 구호로 뒤덮여 있는데도 그것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도, 구호가 구성원의 구체적인 문제를 외면한 ‘아름다운 유혹’이기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