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창 석 (충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우리 민족은 고유 문자가 없었던 탓에 일찍부터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적어 왔다. 그것을 보통 차자표기(借字表記)라고 부르는데, 차자표기가 쓰인 것은 성운학이라는 중국의 이론이 도입되기 훨씬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어와 한자는 서로가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14) 그러므로 한자로 국어를 표기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여러 가지 연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럼에도 만족할 만한 결과는 끝내 얻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점을 절감한 세종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곧 한글의 창제였던 것이다.15)

  세종은 불완전한 차자표기 대신에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 문자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차자표기의 경험과 교훈까지 몽땅 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새 문자의 설계와 제정에 적극 활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새로 만든 문자의 성격이 차자표기가 지향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존의 것에 대한 불만 사항이 곧 새로운 것의 희망 사항이 된다는 점에서 당연한 현상이며, 특이한 일이 아니다.

  한자는 표의 문자이고 음절 문자이다. 그래서 글자 수가 많고 자획도 복잡하다. 한자의 그런 특성들이 국어 표기를 불완전하고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차자표기가 시작되면서 한자의 그런 특성을 국어에 맞게 변형시키는 현상이 나타났다. 즉 한자의 획을 간소화하고 그것을 표음문자화 하는 등의 시도가 일찍부터 있었던 것이다.16)

  그런 과정에서 국어의 음과 한자음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고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즉 성운학이라는 이론이 도입되기 이전에도 우리 나름의 음 분석 전통이 있었던 것이고, 음의 삼분법에 해당하는 인식도 그런 전통 속에서 일찍부터 있어 온 것이다. 예컨대, ‘밤’에서 ㅁ이나 ‘간’에서의 ‘ㄴ’만을 따로 적은 신라 시대의 차자표기 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밤: 夜音, 간: 去隱).

   위와 같이 볼 때, 한글의 청사진이나 제자 원리 등은 외래 이론이나 세종 개인의 창의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어 표기의 오랜 경험과 교훈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본다고 해서 세종의 공과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모든 것을 쉽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더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제자 원리에서 확인되는 ‘과학성’과 ‘독창성’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에 관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생각은 성운학과 성리학이라는 외래 이론의 수용과 그것의 개량, 발전이라는 쪽이었는데,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그 요점만 다시 말하자면, 제자 원리의 내용은 상식적인 것이고 그 상식은 국어 표기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4) 우리말과 중국어가 소리와 문법 면에서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를 잘 한다는 것 특히 영어를 가지고 서양인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15) 세종이 직접 쓴 “훈민정음”의 서문도 ‘우리말이 중국어와 달라 한자와는 잘 맞지 않는다~’ 로 시작되고 있다.
16) 한자의 약자만 쓴 구결 표기 등에서 그런 예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가나도 그런 과정을 통해 별개의 문자로 성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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