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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와라 아츠시(일본)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 한국어문화교육센터 졸업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그 언어를 사용해서 그 나라 사람과 대화를 하여 의사소통이 됐을 때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한국어로 한국 사람과 대화를 했을 때의 모습은 아직도 내 마음과 머릿속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소중하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추억으로…….
  2002년 6월 18일, 나는 대학교 친구와 한국에 여행을 왔다. 여름방학도 아닌 6월에 대학교를 땡땡이까지 치면서 그냥 놀러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겐 월드컵 16강전 한국 대 이탈리아전의 티켓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한국어를 공부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초보자였는데도 나는 내 자신의 한국어 실력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간 매일같이 공부해서 기본적인 단어나 문법은 다 외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친구는 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며 한국어를 조금 아는 나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런 신뢰를 전면적으로 받은 나 자신도 월드컵을 관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사람과 직접 대화할 일들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던 달콤한 자신감은 인천공항에서 대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불안으로 바뀌고 말았다.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대전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물어봤지만 대답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대전에 도착한 후 경기장까지 가는 길을 물었을 때도 내가 말하는 서투른 한국어는 전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절한 한국 분이 유창한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쓸 만할 줄 알았던 내 한국어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에 나는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나를 믿어준 친구에게 할 말을 잃은 나는, 이제부터는 또 하나의 목적인 축구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포츠가 대단한 점은 언어나 국적을 넘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대로 주변에 앉아 있는 붉은악마들과 함께 응원하고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같이 흥분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에서 막 나왔을 때 옆에 있던 어떤 한국 분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어설픈 한국어를, 친구는 나보다 나은 영어를 구사하면서 방금 전에 끝난 경기에 관한 이야기며 우리가 일본에서 월드컵을 보러 와서 잠을 잘 데도 없다는 사정을 열심히 말했다. 그렇게 우리가 하는 말들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그 분은 우리를 보고 불쌍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축구로 통한 우리에게 정을 나누어 주고 싶으셨는지 우리를 자동차에 태워 서울까지 데려다 주셨다. 게다가 자신의 집에 잠자리까지 마련해 주셨다. 우리는 갑자기 찾아온 꿈같은 행운에 눈물 나게 고마워하면서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전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날 있었던 일들은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내가 생애 처음 월드컵을 관전한 날, 그리고 마음속 깊이 한국을 사랑하게 된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