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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연세대 교수)

  ‘귀이개’는 ‘귓속에 들어 있는 귀지를 파내는 기구’다. 귀이개는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의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던 것 같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개 은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칠보로 수를 놓아 화려하게 꾸민 귀이개를 흔히 볼 수 있어서 그러한 추정을 할 수 있다.


  ‘귀이개’를 구성하는 음절인 ‘귀, 이, 개’는 언뜻 보기에 ‘귀이개’의 의미와 연관되는 음절인 것처럼 느껴진다. 즉 ‘귀’는 ‘귀’와 연관되니까 당연하고, ‘이’는 아마도 ‘귀’와 연관된 한자 ‘이(耳, 귀 이)’처럼 생각되고, 그리고 ‘개’는 기구를 뜻하는 접미사의 ‘-개’일 것으로 추정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귀’와 ‘-개’는 그럴 듯하지만, ‘이’는 아무래도 그 해석이 이상하다. 접미사 ‘-개’는 ‘덮개, 깔개, 가리개, 지우개’처럼 그 앞에는 대체로 동사의 어간이 오고, ‘노리개’처럼 명사가 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귀이개’의 ‘이’는 동사의 어간으로도, 그리고 명사로도 설정하기 힘들다.
  ‘귀이개’는 20세기에 와서야 나타나는 단어다. 이것이 처음 문헌에 등장할 때의 형태는 ‘귀우개’였다. 17세기에 처음 보이는데, 15세기, 16세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우연일 것이다. 그리고 이후 20세기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귀우개(耳穵子) <역어유해(1690년)> 귀우개(耳穵子) <몽어유해1768년)> 귀우개(耳穵子) <방언유석(1778년)> 귀우(耳匙) 귀우(槽) <한불자전(1880년)> 귀우(耳穵子)<광재물보(19세기)> 귀우개(耳搔) <조선어사전(1920년)> 귀우개 <조선어사전(1938년)>

  ‘귀우개’의 ‘우’도 해석하기 어렵다. ‘우’가 동사의 어간이어야 하는데 ‘우다’라는 동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존재하지 않는 단어다. 그렇다면 ‘우’는 무엇일까? 아마도 어간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 생략된 어간의 어느 음절은 음운론적인 이유로 탈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와 ‘-개’ 사이에 쓰일 수 있는 동사는 ‘귀이개’의 의미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귀이개’의 이칭에 ‘귀쇼시개, 귀우비개’ 등이 있고 방언형에도 ‘귀우비개, 귀쏘시개, 귀쑤시개’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현대국어의 동사 ‘후비다’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동사가 ‘귀’와 ‘-개’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 음절을 가지고 ‘후비다’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동사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 동사는 ‘우의다’이다. ‘우의다’는 오늘날의 ‘후비다’(刮)와 같은 뜻을 가진 동사였다.

  를 그처 骨髓 내오 두  우의여 내니라 <석보상절(1447년)> 畵師 精妙야 造化의 굼글 工巧히 우의여 이 神俊 그려 <두시언해중간본(1613년)>

  ‘우의다’는 ‘우븨다’(또는 후대의 ‘우비다’)와 동일한 의미를 가졌던 단어이다. ‘후비다’는 훨씬 후대인 19세기에 나타난 어형인데, 국어학적 추정으로는 ‘후븨다> 우븨다> 우의다’로 변화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문헌상에서는 그 순서의 역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우븨칼(剜刀) 우븨다(穵摳) <역어유해(1715년)> 우븨칼(剜刀) <방언유석(1778년)> 우븨다 <방언유석(1778년)> 반시 근쳐에 잇 뎐토우븨여 팔 거시니 <이언언해(1875년)> 글거 우븨다(抓)<광재물본(19세기)> 우븨다(刳) <광재물보(19세기) 후비다 <한불자전(1880년)>

  ‘귀우개’는 ‘귀우의개’로부터 발달한 어형이다. ‘귀우의개’에서 ‘귀우개’로 변화할 수 있는 충분한 음운론적 이유가 있다. ‘귀’의 모음 ‘위’ 때문에 후행하는 ‘우’나 ‘위’ 모음이 이화작용으로 탈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어 ‘귀우개’가 등장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언어현상이 또 있다. ‘귀비개’가 그것인데, 이것은 ‘귀우비개’애서 역시 ‘귀’의 ‘위’ 모음 때문에 ‘우’가 탈락하여 생긴 것이다. 즉 ‘귀비개’는 ‘귀’를 ‘우비는’ ‘도구’인 셈이다.

  이양의 밀화 가락지 마흔 닷 양의 밀화도 엽귀비셔른 닷 양니요 <게우사(19세기)>

  ‘귀우개’에서 ‘우’가 ‘후비다’라는 뜻을 가진 ‘우의다’에서 왔다는 어원의식이 희박해지면서 ‘귀우개’는 여러 형태로 분화를 겪는다. 즉 ‘우비다’와 연관시켜 ‘귀우비개’가 등장하고 ‘이쑤시개’와 연관되어 ‘귀쇼시개’가 등장한다. 오늘날 방언형에는 ‘후비다’와 연계시켜 ‘귀후비개’까지도 나타난다(강릉, 보령, 당진 천안, 연기 등 지역).

  최집이라니 귀우비개 이쏘시개 너흔 최집갓고아 부르면 너무 샹스럽고 최셔방집이라고부를<귀의성(1906년)> 除耳中垢者 귀우게 亦曰 귀쇼시게 <화음방언자의해(18세기)>

  19세기에 ‘귀개’가 등장한다. ‘귀우개’에서 ‘우’가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귀’의 ‘위’ 모음 때문이다.
  결국 17세기에 ‘귀우개’가 나타나서 20세기까지 쓰이었지만, 18세기에 ‘귀쇼시’로도 등장하였고, 19세기에는 ‘귀비개’도 나타났다. 그래서 20세기 초에는 ‘귀우개, 귀우비개, 귀개’ 등이 공존하였다. ‘귀이개’가 등장하는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편찬한 ‘큰사전’(1947년)이다. 이 사전에는 ‘귀우개, 귀우비개, 귀개’를 다 표제어로 삼았지만, ‘귀이개’를 중심표제어로 삼고 있다. ‘귀이개’는 ‘귀우개’의 발음 변이형이다. 이것은 ‘귀우개’가 ‘귀우의개’로부터 나왔지만, ‘우의다’란 어원의식이 희박해지면서 ‘귀우개’의 발음도 ‘귀이개’로 변화를 겪은 것이다. 그래서 조어법도 그 원칙에 변화를 일으킨다. ‘귀이개’뿐만 아니라 ‘귀지’를 파내는 도구라고 하여 ‘귀지’(귓 속에 낀 때)라는 명사에 ‘-개’를 붙여 ‘귀지개’란 어형도 방언형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 단어의 형태가 어원을 명백히 이해할 수 있을 때에는 그 어형의 변화가 적지만, 그 단어의 어원의식이 사라지면서 음운변화를 쉽게 일으켜, 예상 밖의 어형으로 변화하는 모습은 이 ‘귀이개’에서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