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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에서 당시의 지배층은 불편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반이 되는 측면도 있었다. 지배층만이 한문을 배워서 과거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과거 시험은 양반 관료로 편입되어 정치적 권력과 각종 경제적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기반이었던 것이다.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자기들만이 어려운 한문을 배워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의 각종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의 출현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고 별로 반갑지도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세종이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한글이라는 쉬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세종은, 기득권 계층이 한글 같은 문자를 만드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고 반발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한글 창제를 매우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세종은 한글 창제 사업을 매우 은밀하게 추진해야 했기 때문에, 신하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세종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힘을 합쳐서 한글을 만들었다거나, 혹은 세종이 학자들을 시켜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별로 근거가 없는 생각이다.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 등 당시의 기록들은 한결같이 세종이 친히 한글을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혹자는 당시에는 신하들이 한 일이라도 왕의 업적으로 돌리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역사에 이러한 기록이 남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역시 근거 없는 편견이다. ≪세종실록≫을 다 뒤져 보아도 세종대에 이루어진 많은 일들 가운데 ‘친제(親制)’라는 표현을 쓴 것은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세종이 신하를 시켜서 한 일은 분명히 신하를 시켜서 했다고 하지 세종이 직접 했다고 한 경우가 없다. 실록이나 기타 기록에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친제했다고 몇 번이나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을 도운 사람을 굳이 찾자면 신하들이 아니라 세자(뒤의 문종)와 수양대군(뒤의 세조)을 들 수 있다. ≪보한재집(保閒齋集)≫에 실려 있는 신숙주의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서문,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에 실려 있는 성삼문의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서문에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 데 문종이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한글을 만든 뒤 세종이 한글과 관련하여 공개적으로 추진한 첫 번째 일인 ≪운회(韻會)≫의 번역 사업에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때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에게 이 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세자와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한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일을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집현전의 하급 관리들이 한글과 관련된 일에 동원되자 곧바로 2월 20일에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副提學)라고 할 수 있는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문을 올려서 세종의 한글 관련 사업에 제동을 걸려고 하였다. 만약 한글 창제 사업이 1443년 12월 이전부터 집현전의 학자들을 동원하여 버젓이 드러내 놓고 진행되었다면 최만리 등이 1444년 2월에 와서야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집현전의 학자들이 한글 관련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한글이 이미 만들어진 뒤인 1444년 2월이라고 할 수 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임금께서 건강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까지, 그리 급한 일도 아닌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언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4성(四聲)과 7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라고 하면서 대단한 학문적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세종은 중국의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우리말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하기에 적합한 과학적인 문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뛰어난 학자였다는 것, 그리고 요양을 가서까지 한글에 대한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 한글을 만들 만한 학문적 능력을 지닌 사람을 한 사람 꼽으라면 단연 세종을 첫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이 한글 관련 사업에 그토록 애착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자기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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