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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공기의 중요성을 평소에는 잊고 살듯이, 언어나 문자 역시 우리 생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지만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자기 나라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적당한 문자를 가지고 있지 못한 민족이 겪게 되는 고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도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러한 고통을 많이 겪어야 했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사용해서 문자 생활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민족을 초월한 공통 문어 구실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한자와 한문은 공통의 문어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 생활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과는 매우 딴판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문자 및 문어이기 때문에, 우리말을 한자·한문으로 표기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이 벌어졌다. 원래 글(문자 언어)은 말(음성 언어)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자가 오래 사용되다 보면 말과는 다른 독자적인 기능을 갖게 되어, 문어가 구어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는 일도 많이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어와 구어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문과 우리말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말과는 별도로 한자와 한문을 배우느라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한자를 가지고서 우리말을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우선 한문 속에서 우리 고유의 고유 명사를 표기할 때 한자를 빌려서 표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부터 차자 표기법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이런 차자 표기법은 고유 명사 표기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먼저, 국가 상층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전 등의 중인층은 한문 구사 능력이 지배층만큼 능숙하지 못하였고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 등을 동원하여 글의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들의 공문서에서는 어순을 한문의 어순이 아닌 우리말의 어순으로 바꾸고 조사나 어미 등을 보충해서 표기한 변형된 한문이 사용되었다. 이것을 이두(吏讀)라고 한다. 또한 불교나 유고의 경전을 읽을 때 적당한 곳에서 끊어 읽기를 하게 되고 그 앞뒤 표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국어의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명시적으로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을 구결(口訣)이라고 한다. 한편, 자기 감정을 진솔하게 노래로 읊을 때에는 아무래도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 노래를 글로 옮겨서 오래도록 남기고 싶은 경우도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읊은 노래를 한자를 빌려서 표기하게 되었는데, 이런 노래를 향가(鄕歌)라고 하고 이때 사용한 표기 방식을 향찰(鄕札)이라고 한다.
  이렇게 차자 표기법이 발전하여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한자는 우리말을 표기하기에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인 문자였다. 우선 우리말에는 한자의 어떤 음(音)이나 훈(訓)을 빌려서도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었고(예를 들어 의성의태어), 하나의 한자에 훈이 여럿 있는 것이 보통이어서, 차자 표기법에 사용된 한자를 어떤 訓으로 읽어야 하는지 분명치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차자 표기법의 이러한 한계 때문에, 지배층이 한문에 익숙해질수록
차자 표기법의 사용은 축소되어 갔으며, 구체적인 표기 방식도 단순화, 투식화(套式化)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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