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 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앞에서 보여 준 선조 임금의 한글 교서 같은 글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성들뿐 아니라 사대부 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한글 괴문서가 나타나자, 연산군은 한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하고 한글로 된 책을 불사르게 하고 한글을 사용할 줄 하는 사람을 모두 신고하게 하였다. 당시 괴문서를 작성한 이는 양반 계층이었을 텐데, 아마도 자기 신원의 노출을 피하려는 속셈으로 한글을 사용한 듯하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이 또한 한글 사용의 확대에 있어서 여성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 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궁궐 내에 불당을 지어 놓고 예불을 드리고 활자를 가져다가 불경 찍어 내는 일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자, 신하들은 이에 강력히 항의하지만 세종, 문종, 세조대에 이러한 사업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그 뒤에는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불경을 한글로 간행하는 일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도 한글로 불경을 읽어서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극락왕생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소설을 탐독하는 이들이 많았다. 정통한 고문이 아니라 백화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연애 소설, 통속 소설들이 많이 들어와서 사대부들 사이에 많이 읽혔고, 그런 글을 많이 읽은 사대부들은 자기가 쓰는 글에서 그런 소설의 문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이것이 정조에게 문체반정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소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한글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많이 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어떤 시기에, 예를 들어 18세기나 19세기에 전 국민 중 몇 퍼센트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설이 유행하고 상업적 출판이 대두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징후였다. 또한 여기에 공통 문어 중심의 중세적 문화에서 민족어를 중시하는 근대적 문화로의 이행이 함께 얽혀 있다. 한문을 대신해서 한글이 우리나라의 지배적인 문자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은 근대를 향한 진보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갑오개혁으로 국가의 공식적인 문서에서 한글을 사용하게 되고, 개화기에 한문 대신 한글을 사용해야 근대적인 부강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할 때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실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