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깔 있는 글 
노현정의 우리말 이야기 
말의 뿌리를 찾아서 
이런 일을 했어요 
문화 들여다보기 
만화로 배우는 우리말 
우리말 다듬기 
새로 생긴 말 
좋은 글의 요건 
내가 본 한국 사람, 한국말 
일터에서 말하다 
국어 관련 소식 
우리말 실력 알아보기 
처음으로 | 국립국어원 | 구독신청 | 수신거부 | 다른 호 보기

강경구(한성과학고등학교 교사)

  우리는 안다. 한글이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라는 사실을. 왜 한글이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가? 한글이 과학적이기 때문에. 왜 과학적인가? 여기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는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그저 그냥 한글이 세계에서 최고의 문자로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학교 교육으로 그렇게 알라고 세뇌되었다고 해야겠다. 여기서 암기식 교육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길을 벗어나는 느낌이고, 우리가 그렇게 훌륭하다고 의식화된 한글이 왜 온 누리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최근에 국어과 교사의 자존심이라고 하기 이전에 우리의 정체성 문제라고 생각하며 문학 시간에 1446년(세종 28년)에 간행된 『훈민정음』을 학생들에게 읽혔다. 과학고등학교에서 문학 시간에 『훈민정음』을 읽었다면 이것은 교육과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지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의 앞날을 이끌 영재들이라고 하는데 우리 문화의 알맹이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훈민정음』을 읽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는 판단 아래 수업을 준비하였다.
  대학 시절에 『훈민정음』을 강독한 적이 있어서 준비에 어려움이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자료를 마련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훈민정음』 한 권 정도 구입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문고본으로 나온 책이라도 다 구입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돼서 프린트하기로 하였는데, 타자 실력이 형편이 없는 나로서는 우선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얻기로 했다. 막상 자료를 내려받고 보니 한글로 번역된 말투도 그렇고 내용도 어색하여 좀 더 자연스럽고 쉽게 풀어쓰려고 애썼다.(막상 수업을 해 보니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훈민정음』의 한글 번역 자료를 만들고 나서 이것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의 내용을 설명할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만들고, 번역 자료를 인쇄하고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읽기 시작했다. 이것을 읽고 난 뒤에는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 훈민정음의 과학성, 손전화 문자메시지 입력 방식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수행평가를 하겠노라고 알려 주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수업을 하는 동안에 간송미술관에서 국보 전시회를 하면서 국보 70호인 『훈민정음』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소식도 들리고, 문자 입력방식의 특허와 관련된 소송이 보도되었다.
  사실 이 수업을 하게 된 것은 내 고집이었다. 나는 국가에서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빼놓았다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한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글을 더 사랑하지도 않을뿐더러 한글을 만든 뜻을 알고 한글에 대해 더 잘 알고 사랑하지도 않으리라는 꼬부라진 내 생각 때문이었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일보다도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지, 얼마나 과학적으로 훌륭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우리글과 말을 더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 말고도 이 수업을 고집한 이유는 몇 가지 더 있었다. 첫째는 과학을 공부한다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과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읽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보화 시대에 우리글과 우리 문화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재생산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며, 셋째는 앞으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우리 문화의 알맹이를 자랑할 때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이 훈민정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학생들의 수업의 만족도는 직접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높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몇 학생들은 수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알게 되는 대목에서는 우리 글자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눈치였다. 한자를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쓰지도 않는 학생들이 한문을 번역한, 그것도 매끄럽고 쉽게 번역되지도 못한 자료를 읽으려니 그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성리학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제자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아주 낯설다는 얼굴들이었다. 그래도 훈민정음이 현대 언어학 특히 음성학이나 음운학의 내용들이 담겨 있다든가, 손전화의 문자메시지 입력 방식이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반영하였다든가, 외국인들이 한글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든가 하는 내용에서는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타자기나 손전화의 한글 입력 방식과 관련된 새로운 기술을 만드는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하고, 또 그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학생들 자신이라는 점도 덧붙여 주었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부른다든가? 의욕이 앞선 나머지 부끄러운 수업이었다. 그래도 내년에도 다시 도전하고 싶은 수업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훈민정음』을 읽어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보면, 강제적으로라도 읽게 하고 싶다. 내년에는 내 의욕만큼이나 준비도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