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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오(국립국어원 학예연구사)

  어휘는 단어의 무리로, 글의 내용을 전달할 때 기본 재료가 된다. 글을 쓸 때에는 어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상황과 문맥에 맞도록 해야 한다.

1) 법무부에서는 법령의 문장을 알기 쉽게 다듬기 위해 국어 전문가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 법무부에서는 법령의 문장을 알기 쉽게 다듬기 위해 국어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또는 ‘자문했다’).
  자문(諮問)의 ‘諮’는 ‘웃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묻다,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묻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글자이다. ‘자문’은 일종의 질문이다. 어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잘 아는 사람에게 ‘질문을 한다’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자문을 한다’고 표현하면 된다. 이때 ‘자문을 구한다’거나 ‘자문을 요청한다’는 표현은 부적합하다. 그 방면의 전문가는 조언을 할 따름이지 자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문’이라는 단어를 잘못 쓰는 데에는 아마도 ‘자문위원’이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자문위원’은 ‘자문하는 위원’이 아니라 ‘자문받는 위원’이자 ‘조언하는 위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또 자문위원에게 주는 사례비를 ‘자문비’라 하는 일이 있으나 이 역시 ‘조언 사례비’나 ‘상담 사례비’로 일컬어야 할 것이라 판단된다.
  어휘 선택을 할 때 독자의 지식수준이 어떠한지를 고려하여 상호 소통과 이해에 적합한 어휘를 선택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

2) 조정실 근무자 페이징 전파. 비상경보 취명(3회 반복).
→ 조정실 근무자는 비상경보 설비로 화재 발생 사실을 알린다. 비상경보 발령은 3회 반복한다.
  위와 같이 어려운 어휘를 써서 만든 설명문은 독자에게 정보 전달의 소임을 다할 수 없다. ‘페이징’(paging)은 ‘비상경보 설비’, ‘전파’는 ‘알림’이라고 다듬을 수 있기에, ‘페이징 전파’는 ‘비상경보 설비로 (화재 발생 사실을) 알린다’로 쉽게 고쳐서 표현할 수 있다. ‘비상경보 취명(吹鳴)’은 ‘비상경보 발령’이라고 다듬을 수 있겠다.
3) 급수 KIT 중 어댑터(벽 배관용)를 벽 배관에 체결한 후 수전을 어댑터에 체결합니다.
→ 급수 장비(또는 ‘부품 세트, 재료 세트’) 중 어댑터(벽 배관용)를 벽 배관부(또는 벽쪽의 관)에 연결한 후 수도꼭지를 어댑터에 연결합니다.
  위 문장도 제품 사용자의 이해 수준, 지식 정도를 넘어서는 용어를 마구 사용하고 있어서 좋은 글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KIT, 수전, 체결'과 같은 용어는 매우 어렵고 생소한 용어여서 위의 수정문처럼 최소한으로라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어댑터’라는 용어도 다소 어렵지만, 대부분의 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용어여서 반드시 다듬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KIT’는 ‘장비’(또는 ‘부품 세트, 재료 세트’), ‘수전’은 ‘수도꼭지’ 정도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체결’이란 용어는 조약이나 협정 따위를 공식적으로 맺는 경우에만 한정해서 쓴다. 이런 용법 외에 ‘꼭 묶다, 단단히 동여매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것은 일본어 제품 설명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締結/締括’(しめくくる, 시메쿠쿠루)(大漢和辭典 축소복사판, 大修館書店 發行<1968 제2판> 참조). 그래서 수정문에서는 ‘체결’을 ‘연결’로 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