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표라는 그릇
우리가 공식 문서, 공적인 글에 본격적으로 한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부터니까 지금까지 겨우 백여 년이 되었을 뿐이다.
이 기간에 한글 맞춤법을 비롯한……
   우리가 공식 문서, 공적인 글에 본격적으로 한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부터니까 지금까지 겨우 백여 년이 되었을 뿐이다. 이 기간에 한글 맞춤법을 비롯한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 표기법 등의 표기 규정을 정비하고 표준어 규정을 두어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에 공식적인 우리 문자로서의 기능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을 열심히 벌여왔다. 그러면서 과연 한글만을 쓰는 것이 옳으냐,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이 좋으냐 하는 논쟁을 지루할 정도로 오래 벌여왔다. 이런 일들은 모두 언어의 기표적 측면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이 기간이 너무 길었다. 말하자면 말을 담아내는 그릇에 관한 문제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 붓고 그 그릇에 담을 말을 발전시키기 위한 작업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셈이다. 그래서 이런 기표적 측면의 일이 국어 정책의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은연중에 널리 퍼지고, 국어에 대한 관심의 폭이 극히 제한되었었다.
   이제 이렇게 다듬은 그릇에 담아내야 할 내용, 곧 무엇을 어떻게 꾸려서 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할 때가 된 듯하다. 흔히 국어로는 철학을 하기 힘들다느니,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어휘가 적다느니, 표현력이 약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다. 다 옳은 말은 아니지만 국어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데 일정한 공감대기 이루어져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것 같다. 오랜 옛날부터 자기네 말과 글로 문학, 철학,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의 활동을 해온 나라들, 예컨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나라들의 말과 비교해서, 불과 백여 년 전까지도 한자라는 남의 글자, 한문이라는 남의 문법으로 저술 생활을 해온 우리말이 덜 다듬어져 있을 것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데 관심을 돌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말이 정말로 어휘가 부족하고 표현의 다양성이 적은가, 국어 교육이 잘못 되어서 또는 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국어를 정성들여 배우지 않은 까닭에 국어 표현력이 약한 것일 뿐인데 그것을 국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로부터 짚어 가면서 국어의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고 국어 정책의 방향을 잡아가는 일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논리적인 설득이 필요한 경우에는 조리 있고 명석하게, 사실을 전달하고자 할 때는 주관과 객관의 구분이 확실하게, 그리고 감정을 표현할 필요가 있을 때는 감동적으로 상대방과 교감하는 방법에 관한 탐구, 모든 분야의 전문 용어, 전문적 표현을 우리말로 개발하는 작업 등, 이러한 일들을 돕기 위해서는 어떠한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한가, 넓게 말해서 국민의 국어 능력의 극대화를 위한 방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 남기심(국립국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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