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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희(安秉禧) 초대 국립국어원장 별세

작성자 국립국어원 등록일 2006. 10. 25. 조회수 1552

<국립국어원 공고 제2006-33>



안병희 원장님 사진   초대·2대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안병희(安秉禧) 서울대 명예교수가 10월 24일 0시 숙환으로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74세.
  선생은 1933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건국대 교수를 거쳐 1968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국어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광복 이후, 일석 이희승, 일사 방종현, 심악 이숭녕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국어학 1세대 학자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선생은 국어사자료 연구, 훈민정음 연구, 문법사 연구 분야에서 획기적인 논문을 다수 발표함으로써 국어학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생은 초기에는 참신한 이론으로 국어문법 체계를 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1959년 20대의 젊은 나이에 발표한 석사논문 <15세기 국어의
활용어간에 대한 형태론적 연구>는 서구의 구조주의 기술언어학 이론을 우리 옛말에 적용한 것으로, 발표 당시부터 그 이론적 참신함과 기술(記述)의 치밀함으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 필독서가 되고 있다.
  선생은 국어사 연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헌 자료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을 깊이 인식하고, 옛 한글 자료에 대한 서지적 연구도 함께 수행하였다. 학계에서도 선생은 특히 문헌자료를 정확하고 깊이 있게 다루는 국어학자로 정평이 나 있다. <국어사 연구>(1992), <국어사 자료 연구>(1992) 등 10여편의 학술저서와 100편이 넘는 국어학, 서지학 관련 학술논문을 남겼는데, 선생의 논저는 논리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문체가 특히 간결하여 군더더기가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 논문은 발표되는 대로 곧바로 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선생은 1991년에는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창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초대와 2대에 걸쳐 4년간 원장직을 수행하면서 뛰어난 실무처리 능력으로 합리적인 어문정책을 펴는 한편, 국어 유산의 보존·연구로 국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바 있다. 1999년에 완간된 <표준국어대사전>도 그의 원장 재직 시절인 1992년에 편찬 사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국립국어원에서 수행한 연구과제 중에서 장기 사업으로 추진한 &lsquo<표준국어대사전> 편찬&rsquo 사업은 특기할 만하다. 선생은 당시 문화 관련 사업으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막대한 예산을 확보하여 사업을 펼침으로써 국어학계의 역량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종합적이고도 방대한 분량의 국어사전이 완간되어 국민의 국어생활에 길잡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기틀을 다진 공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또한, 선생은 1987년부터 2002년까지 국어심의회 한글분과 위원으로 있으면서 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의 제정과 일부 수정 심의에 참여하여 어문규범의 확정에도 크게 기였하였다. 그 밖에도 국어학회와 한국서지학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진단학회와 국어학회의 평의원, 한국서지학회 고문으로서 국어학과 서지학의 연구에 공헌해 왔고, 문화재위원(국보지정분과)으로도 활동하여 우리나라 문화재의 보존과 연구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월봉저작상(1993), 3·1 문화상(1996), 세종문화상(2002), 동숭학술상(2004)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가족으로는 부인 이돈숙 여사, 아들 장훈(안장훈 내과병원 원장), 용훈(주엠실리콘 과장)과 딸 경화(서울대 언어교육원 연구원) 등 2남 1녀가 있다. 弟 안병규(安秉珪, 전 국회의원).
  빈소는 서울대 병원 영안실 3호, 영결식 및 발인은 26일(목) 7시, 장지는 충북 음성군 &lsquo대지공원&rsquo. (연락처 011-9970-6423).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