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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국어전문교육과정 특강 - 이숭원 교수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4. 1. 3. 조회수 2842

■ 제목: 국립국어원 국어전문교육과정 특강 - 이숭원 교수

■ 주제: 시와 인생

■ 분량: 1시간 25분

    


국립국어원
국어전문 교육과정
이숭원 교수 특강

주제 : 시와 인생
이숭원 교수/ 서울여자대학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이 끝나는 날이라 그러는데 마지막 시간에 뵙게 돼서. 네. (내일 끝나요.) 난 또 오늘로 끝난다고. 내일까지 그럼 하세요. 여기 이렇게 명단을. 제 목소리가 잘 들리나요? 네 명단을 보니까 일반인 중에 오늘의 주제와 관련 있는 분이 계신 것 같아서 한국시낭송예술인 협회 회장님이 계세요? 일반인으로 참여하셨는데 박원초 님. 아 그러세요? 시 낭송을 잘하시겠네요? 있다가 좀 시가 나오면 좀 한번 낭송을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저는 이제 방금 소개받은 거와 같고요. 이것은 또 제가 따로 정리해서 여기에 얹혀 놓은 건데 뭐 이런저런 책을 내고 또 상도 받고 그랬습니다. 여기 경찰 공무원들이 여러분이 계신데 제가 신문에 나온 것 중에 뭘 좀 따 왔어요.

 

오늘 주제가 시와 인생인데 시가 우리 사는 데 뭐 도움을 주느냐 시는 우리 삶과 멀리 떨어진 언어의 가공물 같은 게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좀 몇 개 옮겨왔습니다. 흔히 보는 얘기입니다. 헤어질 때 이별을 통보했더니 화가나 가지고 물건을 훔쳤다. 아주 애교 있어요. 임 모 씨가 연상의 여인 우 모 씨와 사귀다가 헤어지자 그러니까 앙심을 품고 가전제품을 훔쳐 달아났다. 뭐 그렇게 가전제품을 훔쳐 가지고 끝내면 그것도 좋죠. 그다음은 조금 심해서 방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서른셋이고 남자가 마흔네 살 열한 살 차이인데 이 여자가 이제 남자 집에 불을 질러서 한 일억 원의 피해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제 역시 그만두자라고 했더니 남자가 다리를 찔렀어요. 그래서 남자는 쉰한 살 여자는 서른네 살인데 나이 차가 많은데도 친구 관계가 유지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니까 남자가 여자의 다리를 찔렀습니다. 그다음은 이제 이제 좀 더 심해져서 피 냄새가 진하게 나기 시작해요. 그래서 이제 남자가 여자를 회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그다음에 이건 이제 더 심해지니까 빨갛게 색깔을 했어요. 그래서 이거 유명한 울산 자매 사건. 그만 만나자고 문자 통보를 보냈더니 앙심을 품고 칼을 준비해 가지고 계획을 다 세워서 왔는데 마침 그 여동생이 있으니까 여동생부터 죽이고 죽인 다음에 잠깐 당황을 해서 그냥 도망하다 보니까 그 진짜 인물인 언니를 안 죽였다 이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언니를 살해한. 그래서 본인만 죽이는 게 아니라 언니나 동생이 있으면 가족까지 죽이는 그다음에는 이제 어머니까지 죽였어요. 그래서 딸 가진 부모들은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전 다행히 아들이 둘인데.

 

헤어지자고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갑자기 어떤 사람이 밤에 들이닥쳐서 가족을 죽이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귀는 것도 중요하지만 헤어질 거를 미리 좀 염두에 두고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고서 사귀어야 될 것 같아요. 이렇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것부터가 두려운 이 세상에 저는 그래서 이 시를 좀 어릴 때부터 암송을 시켜야겠다. 이 시를 암송을 시키면 적어도 헤어질 때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거 아니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거의 보내 드리우리다. 김소월의 순정한 서정시를 이렇게 써먹을 수도 있겠어요. 어릴 때부터 이걸 아주 외워라. 이걸 외워야 중학을 간다 고등학교로 간다 하면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의 보내 드리겠다 죽어도 눈물 안 흘리겠다. 더군다나 진달래꽃까지 뿌려주겠다 했으니 그게 머리에 박혀있으면 적어도 죽이지는 않고 뭐 진달래꽃 대신에 똥물을 좀 뿌린다든가 뭐 그렇게 아무 탈 없이 목숨을 건지고 헤어진다면야 똥물이야 뭐 세수하면 되니까 그래서 살인 방지용으로 살인 방지용으로 이 시를 좀 암송을 시키면은 되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한 구십 년 전의 시지만 이 구십 년 전의 시가 오늘 사회에 이런 쪽에 용도도 있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진달래꽃이 나왔으니까 여기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이거를 좀 의미를 여기 오신 분들은 이게 그냥 진달래꽃이 아니라 함경북 저 다시 평안북도 영변 그러니까 김소월은 평북 정주가 고향입니다. 정주.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라 평안북도 사정을 잘 알고 그 자기가 살던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가 어디냐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진해 벚꽃이 유명하다 또 제주도 유채꽃이 유명하다 지리산 철쭉제를 지낸다 이렇게 유명한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있죠. 평안도에서 가장 봄에 아름다운 곳이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약산 동대의 진달래. 그래서 봄이 되면 약산 동대의 진달래 약산 동대의 진달래꽃이 아주 아름답게 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김소월은 자기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떠올려서 그 약산에 핀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가득 따다가 가실 길에 뿌리겠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곱게 그 꽃을 밟고 가라. 마치 꿈길을 걷듯 비단 위를 걷듯 그렇게 가볍게 꽃길을 걷고 가라고 이런 축복의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은 이별을 하는 상황은 아니에요. 이별을 가정했죠. 지금은 어떤 형태로든 남녀가 만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만일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싫어진다면 아주 역겨워진다면 그때는 말없이 보내주고 말없이 보내줄 뿐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당신도 잘 알고 있는 그 영변 약산의 진달래 그걸 가득 따다 뿌려줄 것이고 그 꽃길을 밟고 가는 그대를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도 흘리지 않을 그런 자신이 있다. 난 이런 사랑의 진실, 사랑의 약속을 지킬 그 다짐이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진실을 호소하는 시죠. 흔히 진달래꽃 하면 이별의 정이라고 그러지만 사실은 이별의 정한이 아니라 자기가 이렇게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하고 헤어질 때에도 축복을 해주면서 당신을 보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라는 걸 강조하고 있는 시입니다. 그래서 진달래꽃을 좀 이제 암송을 시켜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다음에 이제 신문에 나는 또 사건 중에 하나가 젊은 학생들의 투신자살. 뭐 젊은 학생만이 아니라 사십 대의 가장도 승진시험에 두 번 떨어지는거 이걸 비관해 가지고 평소 좀 우울증이 있었는데 두 번 승진 시험에 떨어지고서는 투신자살을 하고 그런 일이 많이 있죠. 1등 쭉 하던 애가 어느 날 오 등을 했어요. 5등도 잘한 건데 투신자살을 합니다. 수능에 297점 맞아서 3점이 모자라서 좋은 대학을 못 갔어요. 자기가 원하는 대학. 재수하겠다. 재수했더니 295가 나왔어요. 2점이 더 떨어졌다 그래서 수능 시험 끝나면 자살하는 애들이 또 많죠. 이런 일들. 그러면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300점 맞았으면 297이나 5를 맞았으면 250도 있고 200점 맞는 애도 있는데 그렇게 비관할 필요가 없고 또 1등을 계속해서 5등을 했으면 10등 20등 하는 애도 아주 즐겁게 사는데 5급 승진시험에 두 번 안 됐다. 아 6급 7급 8급 9급까지 있는데 그분들도 다 건실하게 사는데 비관해서 자살하고 하는 것 이런 것도 좀 이제 막아 볼 수 있는 시를 골라 봤어요.

 

박목월 선생의 ‘모일’이라는 십니다. ‘모일’. 어느 날 이런 뜻이죠. 어느 날. 읽어보겠습니다.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 관사. 그러니까 영화의 author처럼 시인 박목월, 교수 이숭원. 이렇게 이제 붙인다 이거예요. 박목월 앞에 늘 시인이란 관사가 붙는데 관사가 갓 관 자니까 관 자가 모자 그래서

 

‘…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로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 옷만 입을까 보냐./ 다만 두 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

 

이런 시를 썼습니다. 방북을 선생이 오 남매를 키우면서 참 어렵게 사셨는데 사십팔 세 마흔여덟에야 대학의 전임이 됐어요. 그때까지는 강사를 했습니다. 강사 대학에 강사 하면은 한 달에 백만 원도 못 받아요. 그런데 식구들을 그렇게 키워야 되고 하니까 이 층 적산 가옥에 살면서 간이 이 층이 있어서 식구들이 다 자면은 그 나무 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가서 잠 깨지 않게 그래서 이 층 서재에서 밤새서 글을 써서 수필 잡문으로 글을 써 가지고 그 원고료로 겨우겨우 생활을 해 가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렇게 어렵게 살던 사십 대 초반에 쓴 시가 이 십니다. 사람이 어찌 평생 마른 옷만 입고 지낼까 보냐. 두 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고맙고 눈물겹다. 그래도 내가 시인이기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어떤 인간의 순수성 그거라도 지키고 사니까 괜찮다. 옷도 제대로 내 옷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가족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지만 내 한 몸 또 내 한 머리 나의 어떤 자존심 이걸 지키니까 견딜 만하다 이것인데 사람이 어찌 평생 1등만 하겠습니까. 하다 보면 5등도 하고 7등도 하는 것이고. 사람이 어찌 높은 점수 혹은 높은 지위만 유지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 박목월의 이 시 이런 것도 참 좋습니다.

 

박목월 선생이 63년에 마흔여덟에 한양대 조교수가 돼서 생활을 좀 안정을 얻고 그다음에 이제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산문집도 내고 그래서 그 이름이 알려지니까 육영수 여사가 이제 박목월 선생 시가 좋고 산문이 좋으니까 수필이 참 좋아요. 그래서 박목월 선생을 청와대에 초대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 지도, 작문 지도를 받았다 그래요. 시에 대해서도 좀 배우고 그랬더니 그때 뭐 문인들이 말이 많았어요. 그 박목월 선생 순수 시인인 줄 알았더니 뭐 두 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고맙고 눈물겹다 주머니가 가벼울수록 마음도 가볍다 그러고 수필에 쓰더니 아 청와대 육영수 여사한테 가 가지고 작문 지도 받아 가지고 거기서 돈을 받아서 그 이층집 가 보니까 스팀 뜨뜻하게 떼 놓고서 아주 잘 살더라고 삐걱거리던 계단도 다 든든하게 바꿔서 아주 그 소리 안 나게 해 가지고 잘 살더라고요. 그러면서 흉을 보고 했는데 그렇지만 아니 청와대에서 불러서 영부인이 불러서 나의 그 작문 지도를 해 주십시오. 문학을 좀 가르쳐 주시오. 그러는데 누가 안 가겠습니까. 거기. 안 불러서 걱정이지. 불러서 가서 하니까 돈을 주고 돈을 줘서 그 받아 가지고 그동안 어렵게 살았으니 뜨뜻하게 살라고 스팀도 놓고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러면 그 끝까지 그렇게 삐걱거리는 계단 걷고 늘 두 발이 젖지 않는 것만으로 고맙다 그리고 육십 칠십까지 살아야겠어요? 이것은 한때 자기의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때의 그 심정을 시로 표현한 것이죠. 이런 시기를 거치면 또 몸도 가리고 가족들도 가릴 수 있는 그런 또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참 보면 사람 잘 되는 거를 좀 시샘하고 어렵게 살다가 뭐 잘 되면 아 그 사람이 아부해서 그렇다 이렇게 흠을 잡는 그런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아요.

 

그다음에 또 이제 사건 뭐냐 하면은 내가 뭐 빚에 쪼들린다. 빚을 갖기 위해서 돈을 얻을 방법이 없으니까 가족한테 보험을 들어요. 아내한테 보험을 들어 가지고 아내를 죽여요. 그렇게 보험금을 타 먹고. 심지어는 부모, 형제 보험 들어서 죽이고 보험 타 먹는 그 사건들이 뭐 일주일에 한 번은 나오는 것 같아요. 여기 경찰 공무원 선생님들 잘 아시겠지만 그다음에 이제 내 딸이 심장병인데 심장 수술을 못한다. 오천만 원이 필요하다 .남의 애를 유기해 가지고 오천만 원을 내놔라. 그래서 어떻게 어떻게 돼서 유기한 애가 죽고 돈을 탈취하고 이렇게 남을 희생해 가지고 자기 걸 쓰려는 그런 게 더 많죠. 남을 희생해서라도 내 걸 어떻게 하고 내 이익을 봐야겠다. 제가 후반부에 말씀드린 것은 여기 강의 듣느라고 영화도 못 보셨을 텐데 몽타주라는 영화의 스토리입니다. 최근에 엄정화 김상경? 이런 배우들이 나오는. 그런데 한국 영화가 참 수준이 높아져서 그 감독이 각본도 쓰고 감독을 했는데 첫 번째 작품인데 참 잘 만들었더라고요. 연기도 잘하고 각본도 잘 쓰고. 그런데 경찰 공무원 선생님들은 보시면 좀 불쾌할 거예요. 경찰이 주인공이고 경찰들이 많이 나와요. 근데 하여튼 영화로서는 재미있게 봤어요. 근데 그렇게 그 영화가 바로 이제 유괴 자기의 딸 심장 수술을 하기 위해서 가난하니까 남의 딸을 유기해 가지고 돈을 받고 그것으로 심장병을 고치는 그런 게 모티브가 되어 있어요. 이렇게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내 걸 좀 챙겨야겠다.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실은 꽤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명태’라는 시를 또 소개하고 싶습니다. 명태. ‘명태’라는 시는 잘 모르실 거예요. 이게 명태 아닙니까. 이건 이제 명태를 말린 북어. 이거는 황태. 겨울에 얼렸다 녹였다 해 가지고 장기간에 말린 황태인데 명태라는 시가 있어요. 양명문 시인이 쓴 것인데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에다가 변훈 씨가 곡을 붙이고 오현명 씨가 지금 돌아가셨지만 바리톤 오현명이 노래를 해서 아주 이게 널리 잘 불려졌는데 한번 곡을 들어보세요. 들어보셨을 거예요.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때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 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크하)/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허허허) 명태라고(음하하하)/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허허허허).’

 

네, 전에 이 곡 들어보셨습니까? 네 널리 알려진 곡이죠. 근데 명태를 여러 성악가가 불렀는데 오현명 선생이 최고예요. 오현명 선생. 이 원문에 소주를 마실 때인데 이걸 쐬주를 마실 때 크 이렇게 하는 분은 오현명 선생밖에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허허허 하고 웃음도 오현명 선생이 집어넣고 다른 성악가들은 그냥 그대로 부르는데 그분은 자유롭게 변형을 시키면서 오히려 원시의 감흥을 높이는 그런 노래를 해주셨어요. 근데 지금 돌아가셨지만. 이 명태를 보면 참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자기를 잡아가는 어부인데 자기 잡아가는 어부인데 그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려서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도 하고 이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돼 가지고 그래서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시를 쓸 때 그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서 내 몸이 짝짝 찢어져 없어질지라도 안주 삼아 그분이 술을 먹고 시를 쓰니까 결국은 그의 시가 되면 좋겠다. 내 이름만 명태라고 남아 있는다면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래서 내 몸을 짝짝 찢어 없애버리더라도 그를 위해서 뭘 할 수 있는 자기를 희생시켜서 남을 이롭게 하는 이런 명태예요. 참 어진 마음의 명태입니다. 양명문 선생이 이제 고향은 평양인데 저 함경도 쪽을 생각해서 이런 시를 지었고 변훈 선생이 곡을 잘 썼고 오현명 바리톤이 노래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남을 해쳐서라도 자기 걸 어떻게 얻으려고 하는 이 사회에서 명태라는 시도 어릴 때부터 좀 암송을 시키면 내 몸은 짝짝 찢어져 없어질지라도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렇게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이것을 좀 전하고 싶어요. 내가 제가 좋아하는 박완서 선생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어떤 사람은 오늘 설렁탕을 먹으면 내일은 더 좋은 곰탕을 먹고 모레는 도가니탕을 먹고 글피는 꼬리곰탕을 먹고 이렇게 더 잘살 생각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오늘 겨우 시래깃국 한 죽을 먹으면서도 혹시 우리 이웃에는 이 시래깃국 한 죽조차 못 먹는 사람은 없나 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뒤의 사람 것 같아서 자기보다는 남을 그리고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좀 도와주는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쓴 또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김종삼이라는 시인이 있어요. 여러분에겐 아주 생소한 인물일 거예요. 김종삼. 우리 시 낭송 전문가이신 박원초 선생님은 김종삼 아시죠? 네? (네.) 그래서 김종삼 시인인데 이 사람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평안도에서 성장을 했어요. 그래서 평양에서 제일 큰 극장을 경영했대요. 아버지가. 부자죠. 평양에서 제일 큰 극장을 경영했다. 우리 서울의 옛날에 대한극장 부산의 부영극장 같은 그 극장을 경영했는데 그래서 이제 돈 많은 집의 둘째 아들이니까 일본으로 유학도 가고 일본에서 미술 학교도 다니고 음악 학교도 다니고 아버지는 상업 학교를 다니길 원했지만 이분은 시와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과 시, 미술 이런 걸 배우면서 이십 대를 보내다가 해방을 맞이하니까 귀국을 했죠. 해방돼서 자기 사는 평양으로 갔더니 김일성 세상이 돼 가지고 큰 부자인 자본가인 아버지는 우선 조사받는다고 감옥에 들어가 있고 자기가 살던 큰 집에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다 접수해 가지고 거기 분배를 해서 방을 정해 살고 있고 형은 그 위기를 피해서 먼저 남쪽으로 도망을 갔고 이런 형편이에요. 도저히 북쪽에서는 살 수가 없겠구나. 나는 시와 예술을 좋아하는데 이 아버지도 잡혀가고 형은 도망가고 집안이 망하게 생기고 그래서 도저히 거기선 살 수 없겠다 싶어서 47년경에 몰래 남쪽으로 월남합니다. 이 북쪽에 살다 남쪽으로 온 월남한 분들이 6.25, 1.4 후퇴 때 내려온 분들은 적고 대부분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45년에서 48년 초까지 내려왔어요. 북한의, 말하자면 혹정을 이기지 못해서. 혹정을 이기지 못했다는 거는 그분들이 대개 북쪽에서 지주였거나 자본가였거나 지식인이었거나 이런 사람들이죠. 김종삼이 내려와 가지고 부산으로 가 가지고 형이 먼저 와서 군인 군대에 들어가서 해군으로 있었기 때문에 형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서 사는데 부잣집 아들로 호의호식하고 살던 사람이 부산의 단칸방에 신문지를 깔고 자고 이러니까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뿌리 뽑힌 난민 월남 북에서 월남한 그런 난민의 처지가 돼 가지고 평생을 방랑 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어디 정착하지 못하고. 워낙 나약한 사람이라 그래도 형이 도와주어서 이제 국방부 정원국에 가서 원고도 쓰고 또 동아 방송에 취직을 시켜줘 가지고 이분이 음악을 잘하니까 동아방송 음악 편성하는 데 들어가 가지고 계약직으로서 연장 가능한 계약직으로서 그래서 이제 음악 효과를 틀어 주는 그런 일을 하면서 오십오 세까지 정년까지 이제 동아방송에 있었어요. 물론 결혼도 하고 애도 있었는데 저 사회 적응을 못해요. 자기의 본고향을 잃어버렸고 자기가 원하던 그 세계에서 이탈됐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서 늘 떠돕니다. 거의 알코올 중독이죠. 예 동아방송에 있을 때도 이제 직원들이 다 퇴근하면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와서 소주 한 병을 먹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밤을 지내요. 그러다 거기에 쓰러져 자고 아침이면 직원들이 출근해 가지고 김 형 김 형 이제 일 시작이야 그리고 어 그런가 해서 틀어달라는 음악 찾아서 틀어 주고 녹음해 주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또 그렇고. 55세에 퇴직을 하니까 갈 데가 없어요. 63세에 세상을 떠났죠. 그러니까 이제 아침에 그 참이나 좀 얻어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나와서 어디 신문사나 혹은 직장에 있는 자기 친구나 후배를 찾아갑니다. 어느 신문사 기자로 있는 친구. 그래서 “김 형 김 형 내가 왔소.” “어우 선생님 웬 일이십니까?” “나 오늘 점심 사줄 수 있소?” “오 선생님 사드려야죠.” “김종삼 씨 모시는 게 영광이죠.” 그렇게 점심 먹으러 가요. 설렁탕 하나 시켜 놓고 먹는데 김종삼 씨가 “나 소주도 한 병 시켜 줄 수 있소?” 그러면 소주 마개로 딱 따서 설렁탕 안주로 반쯤 먹고 반은 마개 딱 닫아 가지고 신문지에 뚤뚤 싸서 그리고선 남대문 남산 서울역 이런 데 돌아다니다가 저녁때가 되면은 또 다른 직장 어느 잡지사에 가 가지고 “박 형 박 형 내가 왔소.” “오 선생님 웬 일이십니까?” “나 저녁 좀 사줄 수 있소?” “아이 사드려야죠.” 짬뽕 한 그릇 시켜 놓고 그러면 이제 똑같이 소주 반병 남은 거 먹고 “소주 한 병 또 시켜줄 수 있소?” “아 네 선생님.” 그럼 이제 또 반병 먹고 나머지는 가지고서 집으로 가다가 어느 골목에서 먹거나 이렇게 살았어요. 그러니까 이제 여러 가지 병이 닥칠 수밖에 없죠. 두 번의 큰 수술을 하고 그래도 살아남고 너무 사는 게 괴로워서 자살 기도도 하고 또 그래도 살아남고 그러다가 63세에 삼양동 산꼭대기에 판잣집에 살았는데 그 미아리에서 내려 가지고 삼양동 쪽으로 올라가는 그 언덕을 올라가다가 그만 쓰러져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이 12월 8일인데 이렇게 생긴 분이에요. 이렇게. 그 저하고는 참 많이 다르죠. 역시 고민을 가지고 고뇌하면서 세상을 살아간 분이라 아주 바짝 마르고 참 시인으로서의 어떤 개성 같은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평론을 하는데 시를 쓰는 사람이라 평론을 하는데 제 평론을 읽은 사람이 저를 만나면은 깜짝 놀래요. 선생님이 이숭원 선생님이시냐고 평론을 볼 때는 굉장히 샤프해 보일 줄 알았는데 아주 비둔해 보인다 이거죠. 그러니까 저 뚱뚱해서 손해 본 게 참 많아요 어떤 사람은 아주 이숭원이가 한 번 만났더니 바다코끼리 같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평론을 쓰겠냐고 근데 이분은 참 시인다운 이런 바짝 마른 그리고 뭔가 불만이 있는 그리고 이 자기 세계에 이렇게 몰두해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이분이 쓴 시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시인은 1984년 12월 8일인데 이 날짜를 제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1984년 9월 15일에 제가 결혼을 했거든요. 그때 충남대 교수였는데 충남대 교수로 있으면서 이제 집은 서울이어서 결혼해서 대전에서 살다가 그다음에 이제 방학이 되면 서울로 와서 부모님하고 있고 제가 외아들이기 때문에 누나만 셋 있는 우리 외아들이어서. 그렇게 지냈어요. 그래서 9월 15일에 이제 결혼해 가지고 살면서 이 김종삼에 대한 글을 쓰려고 제가 김종삼 시도 읽고 김종삼이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김종삼 참고 자료를 막 메모를 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때 신혼 때니까 집사람한테도 김종삼 시를 보여주면 참 좋다 그래요. 시가 이렇게 깨끗하고 좋으냐고 내가 시를 읽다가 또 울면 같이 울어요. 신혼 때니까. 그리고 또 김종삼 씨가 김종삼이 좋아하는 음악 그걸 틀어 놓고 이거 들어봐라. 죽은 아이를 추모하는 노래. 현대어 토텔리드 그 누구죠? 독일의 작곡가 그 곡이다. 그러면 아주 같이 듣고 공감을 하고 그렇게 취재했어요. 그러다가 이제 방학이 돼서 12월 방학이니까 방학 때 서울로 와 가지고 자료 다 가지고 와서 방학 때 이걸 계속 준비하면서 지냈는데 서울에서 서울에는 부모님이 계시고 근데 이제 제가 외아들이라 아버지하고 아버지가 절 외아들이니까 귀여워했는데 버릇이 없어요 외아들. 그래서 아버지한테 막 대들고 싸우기도 하고 그래서 그날도 이제 무슨 일로 아버지하고 다퉜어요. 다투니까 그 아버지가 이렇게 살려면 대전으로 가 왜 올라와서 그러는 거야 대전으로 가 그래요. 그래서 간다고 못가요? 그러고 내가 문을 박차고 나왔어요. 나오면서 또 성질이 있어 가지고 그냥 나오질 않고 김종삼에 대한 자료 쭉 벌려놨던 것 에이 이런 거 다 틀렸다 하고 이런 거 해서 뭐해 그러면서 그걸 또 막 찢어서 쓰레기통에다 집어 던지고 다시는 이런 거 안 보겠다고 그리고 나왔어요. 대낮이라 갈 데가 없고 친구들은 전부 직장에 교수만 방학이 있죠. 그래서 여기 나오는 것처럼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을 걸어서 남대문 시장에 가 가지고 빈대떡도 사 먹고 그러고서 저녁 7시쯤 돼서 친구한테 연락하니까 이제 만나서 만취가 돼 가지고 집에 들어왔어요. 그때 12시쯤 집에 들어오니까 그 집사람이 그 김종삼의 자료 내가 다 찢어버렸던 그 자료를 풀과 테이프로 복원을 해 가지고 그대로 원상 복구를 해서 내 책상에 이렇게 쌓아놨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아주 감격을 해서 참 그때 이후로는 내가 집사람한테 꼼짝 못하고 사모님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평생을 혼외정사 없이 대변인 청와대 대변인 윤 아무개처럼 그런 거 없이 그저 아주 고개 숙이고 살고 살아오고 있어요. 그 옛날에는 그렇게 내가 뭐 김종삼 시를 읽으면서 눈물 흘리면 같이 울고 그러던 사람이 요즘엔 아침 신문에 뭐 좀 가슴 아픈 기사가 있어서 울고 있으면 왜 또 아침부터 질질 짜는 거야 이래요. 여기 슬픈 기사가 났어요. 나이가 몇인데 울어요. 내일모레 내일이면 육십인데 오십 대 후반에도 울고 있느냐 그러면서 아 그래도 가슴 아프니 어때 들어가 똥이나 싸요 똥 싸야죠. 사람이 아침에 똥을 싸야지. 똥을 안 싸면 사람이 죽는 거 아닙니까. 참 나이 들어서도 고마운 말을 그렇게 해요. (청중 웃음) 하여튼 그래서 내가 12월에 방학 때 와 가지고 김종삼 이거 준비하다가 그 일이 있고 이틀 후인데 신문을 보니까 8일에 돌아가셔서 12월 9일 자 신문에 김종삼 선생이 작고했다 그래서 그 장례식장은 어디고 발인 미사는 길음성당에서 한다 그게 기사로 나와 있어요. 저는 그때 등단하지 않았을 때라 문상은 안 갔습니다. 그렇지만 김종삼 선생이 이렇게 돌아가셨으니 내가 쓰던 걸 빨랑 완성을 해야겠다 그래서 열심히 써서 발표를 했죠. 지금부터 29년 전의 일입니다.

 

근데 김종삼 시인이 이렇게 자기 일을 그대로 썼어요. 종로와 남산과 걷다가 남대문시장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그 남대문 시장에서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마음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고 고귀한 인류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뭐 교수를 하고 평론가에게 좋은 평을 듣고 1년에 한 번씩 시집을 내고 육십이 되면 시 전집을 두꺼운 걸 내고 그런 사람이 시인이 아니라 바로 남대문시장에서 순하고 명랑하게 아무리 고생돼도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웃고 지내는 그 사람들이 진짜 시인이다. ‘사실은 삼십여 년 시를 써 왔지만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참 아주 가슴 아픈 대목이에요. 요즘은 시 써 가지고 5년 10년만 되면 대가 행세를 하고 시 강연을 다니고 그래요. 김종삼은 “삼십 몇 년을 시를 쓰고서도 시인이 못됨으로 시가 잘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리고 옛날에 죽은 윤동주 윤동주 시인은 일제 말에 살면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런 고백을 했어요. 근데 요즘은 살기 편해 그런지 시가 너무 쉽게 쓰여지고 아주 시인들 시 전집 내는 거 보면 한 손으로 들 수가 없어요. 너무 두꺼워서. 무슨 시를 그렇게 많이 썼는지 그래서 그런 시 전집은 용도가 책꽂이 책을 쭉 가운데 놓고 이쪽에 시 전집 하나 이쪽에서 시 전집 하나 벽돌 역할을 해 가지고 책들을 보관할 수 있는 그런. 그런데 이분은 평생 시도 별로 많이 안 썼고 그러나 이분이 남긴 시들이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서 요즘 젊은 시민들이 제일 그 영향을 받은 시인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 김종삼이라는 거예요. 행려병자처럼 쓰러져 죽었지만.

 

이분이 이제 이런 시도 썼습니다. ‘소공동 지하상가’. ‘두 소녀가 가지런히/ 쇼윈도 안에 든 여자용/ 손목시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얼굴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키가 작다/ 먼발치에서 돌아다보았을 때에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쇼윈도 안을 정답게 들여다보던/ 두 소녀의 가난한 모습이/ 며칠째 심심할 때면/ 떠오른다/ 하나같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작은.//’ 그 하나같이 동그랗고 하나같이 작은 소녀 벌써 그 모습에서 가난한 소녀라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어요. 두 소녀의 가난한 모습이라고 안 해도 가난한 소녀 둘이니까 자매인지 여자용 손목시계를 어머니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는지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김종삼 시인이 한참 걸어오다가 뒤돌아봐도 그때까지 뒤돌아보고 그때까지 들여다보고. 그래서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 두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더라. 자기 자신도 가난과 병고 속에 살면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살까지 한 사람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이런 따뜻한 인정의 세계를 눈여겨보고 그걸 가슴에 담아 두려 한 김종삼 시인.

 

그런데 얼마나 살기 괴로웠으면 두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어요. 자살 기도 해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또 살아났어요. 목숨도 길다고 얘기를 했어요. 자기가. 남들은 다 소생하지 못할 거라고 그랬는데 또 살아나 가지고 이젠 병원을 돌아다니기 시작을 해요. 중환자실에서 어느 아낙네를 만났어요. 아낙네하고 말동무가 됐어요. 아낙네가 얘기합니다. 월세방에서 사는데 남편이 맞아서 쓰러져 가지고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어요. 이 월세 집을 내놓아도 병원비의 반도 안 돼요. 그렇지만 난 남편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한참 지난 다음에 또 그 아낙네를 봤어요. 새벽인데 어둠 속에 잠이 들어 있어요. 지나가려니까 깨어나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니까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가망이 없어도 또 돈이 얼마나 들어도 남편의 입에서 산소 호흡기를 뗄 수는 없다 그것을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앞날을 향하여’ 십니다. 제목이 ‘앞날을 향하여’. 그 아낙네의 남편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 그걸 보고서 자신도 자살의 그 절망에서 이겨나 가지고 앞날을 향해서 나갈 수 있는 마음을 발견했다 그런 뜻이겠지요. 이렇게 참 시래기 하나를 시래깃국을 먹으면서도 우리 이웃에는 시래깃국조차 못 먹는 사람이 없나 하고 염려하는 이런 마음의 소유자 그러나 본인은 아주 괴로워한 감옥살이하다 괴로움의 근원이 여기 있어요.

 

1972년에 쓴 신데 짧은 십니다. 1947년 봄에 피난 올 때 저 황해도 해주에서 배를 타고 해주에서 인천이 제일 가까우니까 이제 38도 선으로 분단돼 있을 때고 48년 8월 15일 48년 9월 9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열린 다음부터는 통행을 못했어요. 이때는 그래도 통행이 가능합니다. 몰래. 물론 경비원한테 들키면은 잡혀가 가지고 감옥살이하거나 죽거나 그렇죠. 그래서 조심조심 노를 저어서 남쪽으로 오는데 어떤 갓난애가 울어요.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 그러면 숨을 틀어막죠. 소리 나면 안 돼요. 우리 들켜요. 숨을 틀어막고 한참 와 보니까 애가 질식해서 죽어 있어요. 그럼 배에서 죽었으니 수장을 시키죠. 어디다 수장시켰는지 알지도 못해요. 바다의 위치를 스물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그 북쪽에서 살지 못해서 남쪽으로 피난 온 피난 난민들의 고통과 아픔 슬픔 이것을 스물 몇 해나 지나서도 제대로 이해해 주고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바로 여기에 김종삼의 아픔이 있었던 것입니다. 뿌리 뽑힌 삶을 살게 된 근원이 여기에 있어요. 근데 이 시인은 딱 하나 이것만 썼고 그 외에는 전쟁 얘기도 안 하고 자기가 고향 잃어버렸다는 얘기도 하지 않고 지냈어요. 제목이 민간인인데 이 제목이 난 참 아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데올로기의 그 힘을 쥔 당사자들 정치 권력을 가진 자 돈을 가진 자 그래서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오늘 아침 신문에도 재벌들이 뭐 버진아일랜드 참 이름이 좋아요. 버진 아일랜드 처녀의 섬이에요. 그래서 어느 뭐 뉴욕에 있는 섬인가 했더니 저 중미 중미에 있는 지도에도 잘 안 나타나는 30개의 조각난 섬으로 되어 있는 거기가 버진 아일랜드인데 반은 영국령이고 반은 미국령이래요. 아직도 식민지예요. 근데 거기가 아주 자유 지대라는 거예요. 세금도 없고 뭐 그래서 재벌들이 거기다가 페이크 컴퍼니 세워서 유령회사 세워서 다 돈을 숨겨 놨다. 그런데 민간인들의 고통 이렇게 육이오 전부터 분단이 돼 가지고 몰래 넘어오다가 아이가 죽고 또 총을 맞아 죽고 육이오 때 그 이후에 당한 민간인들의 고통을 과연 충분히 이해하고 있느냐. 스물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이렇게 고통 속에 산 김종삼 시인이,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소년기에 노닐던 ‘그 동뚝 아래/ 호숫가에서/ 고요의 피아노 소리가/ 지금도 들리다가 그친다// 사이를 두었다가/ 먼 사이를 두었다가/ 뜸북이던/ 뜸부기 소리도/ 지금도 들리다가 그친다// 나는 나에게 말한다/ 죽으면 먼저 그곳으로 가라고.//’ 너무 사는 게 괴로워서 자살 기도까지 두 번이나 했던 이 사람 삶의 괴로움이 죽은 다음에 자기가 가고 싶은 어릴 때 아늑한 평화로웠던 그곳. 피아노 소리 들리고 뜸부기 소리 들렸던 그곳으로 죽어서라도 제일 먼저 가고 싶다 이런 소망을 얘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삶이 괴로우면 이런 시를 썼겠어요. 이런 괴로움 속에 살면서도 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눈여겨보고 거기서 따뜻한 마음을 찾으려고 했어요. 자기의 고통을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죄인이어서 수억 년간 주검의 연쇄 주검이 계속돼 그 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살고 있고 악령들과 곤충들에게 시달렸다 다시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령과 곤충들에게 시달리는 삶이 죽어서도 계속될지 모른다.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길이 있다는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해 가보자. 그치지 않는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 이렇게 자기 삶의 괴로움을 직접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괴로움 속에서도 아까 예로 들었던 그 시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소공동 지하상가 또 앞날을 향하여 그런 데서 가난한 사람들의 인정의 세계를 표현했다는 게 놀라워요. 그래서 제가 29년 전에 썼던 그 글의 끝부분을 여기 따 왔습니다.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고 말한 이 시인 이거는 자료집에 없어요. 나눠드린 데 이건 없습니다. 제 글이어서. 이 시인에게서 이와 같이 충만한 인정의 세계가 표현된 것 또한 신의 기적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인지 시인은 한겨울의 새벽에 죽음의 길로 떠났으니 그의 나이 예순셋. 그 추운 길을 밟아 그가 이를 곳이 한결같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 한결같이 마음이 고운 이들이 산다는 곳이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다. 허나 그의 추측대로 막막한 바다를 헤매는 영혼 없는 방황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시편들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안식과 위안을 주니 이 땅에 더 이상 미련은 없으리라 한 골짜기에서 앉은뱅이 한 그루의 나무를 보았다 잎새들은 풍성하였고 색채 또한 찬연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잠깐이라지만 이런 짧은 시가 있어요. 요 한 그루의 나무가 김종삼의 시가 아닐까 앉은뱅이 자그마한 나무인데 그런데도 인간보다 더 오래 살면서 풍성한 잎새와 찬연한 색채를 보여 주는 그래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백 년 뒤에도 이백 년 뒤에도 인간의 생명은 잠깐이어서 육십삼 세에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남긴 시는 앉은뱅이 나무처럼 작아 보이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 계속 위안을 준다. 슈베르트는 서른한 살에 죽었습니다. 서른한 살. 그러나 슈베르트가 남긴 가곡 그 악곡들은 우리에게 참 감동을 줘요. 그런데 이 음악가들이 다 가난 속에서 취직하려고 애쓰는데 일자리가 없고 거의 굶어 가면서 그렇게 작곡을 했어요. 인간의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를 창조해냈는데 결국 서른한 살에 병이 들어 죽고 모차르트는 서른네 살에 죽었어요. 모차르트는 결혼도 하고 했지만 결국은 궁정 악사로서의 삶을 지속할 수 없어 가지고 귀족들한테 배반당하고 그러면서 서른넷에 들어서 식은땀을 흘리고 죽었고 그렇게 잠깐 살았지만. 슈베르트, 베토벤. 저 누구죠? 모차르트의 음악. 이건 앉은뱅이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지금 이백 년 삼백 년 사백 년을 건너뛰어서 우리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이죠. 베토벤은 오십칠 세에 죽었는데 참 베토벤이야말로 기적적인 인물이에요. 삼십 대에 난청이 와 가지고 멀리 있는 플루트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사람하고 대화를 나눌 수 없어요. 그런데도 오십칠 세까지 계속 작곡을 했어요. 오십이 넘으니까 완전히 귀가 먹었어요. 완전히. 완전히 귀가 먹어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전원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전원 교향악 여섯 번째 교향악을 작곡을 합니다. 그래 가지고 또 작곡하고 결국 오십사 세 죽기 삼 년 전에 마지막 고향곡 합창 제9번 그 기쁨의 송가라는 환희의 송가라는 ‘The song of Joy’가 관현악으로는 오케스트라 이 교향악으로는 제일 처음으로 성악이 등장하는 그런 형식의 실험을 거친 그런 교향곡을 작곡을 했죠. 참 그렇게 고통 속에 산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를 표현했다는 게 기적 같은데 이 김종삼의 시를 읽을 때에도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백석이라는 시인은 아마 아시는 분이 꽤 있을 거예요. 백석 신문에도 나고 그래서. 백석은 아시죠? 모르세요? 그래도 좀 들어본 분이 계세요? 백석. 그럼 오늘 들어보세요. 백석은 일제 시대 사람이에요. 191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서 정주에 있는 오산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의 장학금을 받아서 일본의 아오야마 학원의 영어 사범과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을 하고 조선일보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조선일보사에 편집부에 취직을 해 가지고 근무하다가 이제 36년 1월에 사슴이라는 시집을 냅니다. 그래서 이 시집이 참 독특해요. 우리 토속적인 고향에 세계를 드러낸 작품이에요. 그래서 그 당시에 굉장히 선풍을 일으키고 백석의 시집 사슴에서 잃었던 고향을 찾았다. 근데 이 시집을 내고서 또 조선일보를 떠나서 함흥에 영생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갑니다. 거기서 김자야라는 기생을 만나요. 기생하고 연애를 해요. 그게 연애라니까 소문나죠. 학교 선생님이 기생이랑 연애를 한다. 그리고 백석의 본가에서는 이제 나이가 스무 살이 훨씬 넘었으니까 결혼을 시키려고 하는데 기생한테 정신이 팔려 결혼도 안 하고 그러니까 김자야가 내가 더 이 남자 옆에 있다가는 이 남자를 완전히 망치겠구나 그렇게 서울로 도망 와요. 그래서 일 년간 함흥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계속하다가 결국 함흥영생고등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와서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가 가지고 김자야와 정식으로 동거를 하면서 이제 지냅니다. 그러다가 1939년 10월 1일에 조선일보도 사표를 내고 그때 이제 개발된 만주 만주 제국의 수도 심지 지금의 장춘이에요. 그곳으로 이제 이주해 가요. 근데 이주해 갈 때 김자야한테도 같이 가자 사랑의 도피를 하자고 했는데 김자야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되는 게 별로 없고 앞길을 막을 뿐이다. 그래서 또 김자야가 점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백석이 혼자 만주로 가죠. 그래서 만주에서 해방될 때까지 지내다가 해방돼서 이제 자기 고향 정주로 돌아오고 그다음에 평양에 가니까 또 김일성 세상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김일성 세상 된 북 북조선노동당에 가입을 하고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문화기술총동맹 중앙위원회에도 참여하고 그러나 북쪽에서 요구하는 작품은 쓸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이. 그 써 오던 작품이 아니어서. 번역을 열심히 합니다. 번역. 번역을 하다가 나중에 동시를 어요. 동시. 그런데 동시에도 사상성이 들어가야 돼요. 끝부분에 가서 사회주의 찬양을 하든가 무슨 그 수령에 대한 찬양을 하든가 이렇게 써야 되는데 당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든가 처음엔 동시에 그런 걸 집어 넣어다가 동시집도 하나 냈어요. '집게네 네 형제'. 묘하게 이 북한에서 나온 동시집이 우리나라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또 들어가 있어요. 백석의 작품이 1988년에 해금됐는데, 그 해금된 그때 이제 이게 출판도 됐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동시니까 그 동시 이야기를 담은 동시니까 그거를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을 했죠. 그래서 또 이게 문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게 동시를 썼는데 이렇게 동시집도 내고 그러는데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아무런 비판을 안 하고 하니까 아 이제 동시는 순수하게 써도 되나 보다 하고 끝에 사상성이 안 나타난 순수한 동시를 써요. 그랬더니 당장 비판이 옵니다. 아주 격렬한 비판이 와 가지고 사상성을 몰각한 사회주의 작가다 그런 비판을 받고 비판을 받았으면 당장 자기반성을 해야 되는데 이 백석은 자유주의 자유주의 물이 든 시인이니까 동화나 동시에 관한 한 사상에서 자유로워져도 되는 게 아니냐 이런 반론을 써요. 반론을 쓰자마자 숙청당합니다. 그래서 1959년 1월 양당도 삼수군 삼수갑산 하는 삼수 옛날 함경북도 삼수 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제 개편된 도로는 양강도 저 함경도 끝 두만강 인접 지역이죠. 그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협동조합으로 내려가서 처음에는 축산반에 배치가 되고 양치기를 해요. 양치기. 그랬더니 이 양치기로 배치된 다음에 금방 편지를 씁니다. 중앙당에 당의 명령으로 여기 와 가지고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기 때문에 기쁨에 넘친다. 이렇게 해 가지고 내 사상이 금방 변하게 됐으니 빨리 나를 좀 사상 개조된 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나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근데 문학하던 사람이 양치기 할 수 있나요. 그래서 이제 농산반으로 더 올려서 농사를 지어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1996년 1월 85세로 죽을 때까지 삼수군 농장에서 농사꾼으로 살았어요. 생애의 반은 생애의 반은 시인으로 생애의 반은 농사꾼으로 살았죠.

 

백석의 사진입니다. 교복 입고 찍은 사진은 일본의 아오야마학원 청산학원 영어교육과일 때 그때 찍은 사진이고 그 옆의 사진도 그렇고. 아래쪽은 함흥에 영생보고 교사로 지낼 때의 모습입니다. 머리가 특이하죠. 머리가 아래 오른쪽은 이제 칠판에 영어를 써 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모습입니다. 그 당시 백석의 외모를 묘사한 걸 보면은 한데 바다의 물결을 연상시키는 외이브진 머리를 휘날리며 광화문 네거리를 걷는 한 청년의 모습은 그 주위를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착각시킨다. 굉장히 멋쟁이 청년 옷은 연둣빛 더블 브레스트를 입고 연둣빛 빨간 넥타이를 매고 그리고 머리는 어떻게 곱슬거리는 그런 머리 근데 이게 파마를 한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머리가 원래 이런가 봐요. 그래서 이렇게 휘날리는 머리를 하고 다니던 멋쟁이 청년 시인 그 청년 시인이 이제 함흥영생보고에서 영어 교사를 할 때 사진입니다. 이것은 영생보고 영어 교사 때 축구부 지도를 했는데 이제 축구부들을 데리고 서울에 왔을 때 그때 찍은 사진이에요. 고등학교 축구부들 키가 클 텐데 그 축구부 단원하고 서도 백석이 키가 더 크죠. 그니까 상당히 키가 호리호리하고 멋쟁이 시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건 교지 편집하는 모습이고.

 

그다음에 이 여인이 김자야 여사입니다. 본명은 김영한 기명은 진향 경성권본 소속의 기생인데 함흥에 자기 은사가 감옥에 들어가 있어서 면회를 왔다가 함흥에 잠시 머물면서 요리 집에 있을 때 백석을 만났어요. 그래서 옛날에 이렇게 얼굴이 동그란 그런 동그랗 데데한 이런 얼굴이 이제 미인이죠. 요즘은 뭐 얍삽하니 브이 라인이지만 그런데 이 여자는 이제 백석이 만주 가자 그럴 때 잠적을 해 가지고 서울에서 백석 떠난 다음에 계속 살다가 해방 후에 미군이 들어오니까 미군을 미군들을 접대하는 카페를 운영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돈을 꽤 벌고 미군들한테 영어도 배우고 굉장히 생활 수완이 있는 여자죠. 미모도 있고 그래서 중앙대를 들어왔어요. 중앙대. 중앙대 들어갈 때는 중앙여자대학이에요. 육이오 전엔 중앙여대 중앙여대로 들어왔는데 육이오가 나 가지고 전시 연합대학 이거를 피난 다니느라고 학교 못 나갔고 육이오 기간 동안 또 미군들을 상대하는 카페를 열어 가지고 돈을 또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이제 육이오 끝난 다음에 53년에 흑석동 중앙대학으로 복학을 하려고 봤더니 여자대학이 남자대학이 돼 가지고 종합대학이 돼서 중앙대학교가 됐고 이제는 과를 정해야 된다. 예전엔 중앙여대 땐 문과인데 이제는 과를 정해라. 자기가 미군한테 영어를 배웠거든요. 그래서 나는 영문과를 가겠습니다. 영문과 한 1년 반 다녔어요. 그리고 졸업했습니다. 근데 중앙대 영문과 출신이에요. 인텔리죠. 그래서 자기의 지력과 기생으로서의 어떤 재능과 또 아직 삭지 않은 미모 이걸 활용해서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을 했어요. 대원각. 그래 가지고 수백 억 재산간데 말년에 그 1988년에 백석이 해금돼서 백석 작품이 다 공개되고 책으로 나오니까 이 여인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내가 바로 백석과 2년 동안 연애했던 김자야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그 매일 똑같은 넥타이만 맨다고 한 넥타이 내가 명동에서 사준 거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영어로 찍은 것 그거 시민관에서 보고 나올 때 백석이 나한테 당신이 나타샤야하고 얘기했다. 그래서 발표한 시를 나한테 보여 줬다.

 

그래서 '내 사랑 백석'이라는 책을 냈어요. 자서전을 본인이 구수를 했고 백석 전문가가 이제 대필을 해 줬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래서 이제 백석을 좀 기리는 뜻에서 수백 억 재산가니까 삼 억을 기탁을 해 가지고 창비사에 그래서 이제 창작과 비평사에서 백석 문학상을 제정을 해서 지금까지 상금 천만 원의 문학상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백 억 재산가가 삼 억밖에 안 내놓느냐고 그건 아까 박목월 보고 스팀 떼고 산다고 하는 거나 똑같은 거예요. 삼 억이 적은 돈입니까? 삼 억이? 생돈인데 백 억이 딱 대원각 요정에 묶여 있지 현금 백 억이 있나요? 현금 삼 억을 개척을 했어요. 옛날에 잠시 사귀던 그 여인을 위해서 그러니까 여자를 사귀려면 이런 여자를 사귀거든요. 근데 저는 뭐 지금까지 그때 그 29년 전에 그 일 이후로는 아주 집에서 공처가로 사니까 그리고 김자야 여사는 대원각을 법정스님 자기가 존경하는 이 사람 요정 할 때 현판에 붙여 놨는데 술에서 깨면 주심과 놀고 다시 술에 취하면 주심과 놀고 술에서 깨면 부처와 논다 그래서 불교를 숭상하는 불교 신자. 그게 불교인 중에 제일 존경할 분이 법정 스님이라 이거예요. 법정 스님 그 법정 스님에게 수백 억 되는 대원각을 무상 기증을 했어요. 그래서 대원각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게 성북동의 길상사라는 절입니다. 법정 스님은 깨끗한 분이라 법상사 주지 안 하고 자기 제자한테 절 맡기고 저 전라도 산꼭대기가 가 있다가 죽어 돌아가셨죠. 산에 공기 맑은 데 사는 분인데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담배 한 대 안 피웠는데 원래 폐가 체질이 유전적으로 폐가 나쁜 분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법정 스님의 장례식을 길상사에서 치뤘죠. 그 길상사 바로 김영한 여사 김자야 여사의 소유였던 대원각입니다. 그 이분은 이제 지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또 사연이 있는데 아마 이 얘기를 하니까 신문에서 그런 거 본 것 같다. 그 시인이 있었다는데 시인을 위해서 문학상도 만들고 전 재산을 법정 스님에게 희사했다더라 하는 그 여자의 애인이었던 시인이 바로 백석입니다.

 

이것은 백석의 70대. 여기서 아까 1996년에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1980년대 그 북한의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사진이에요. 70대의 사진. 역시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고 인민복을 입었죠. 이거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부인과 아들딸. 이거 어떻게 얻었느냐. 백석 매니아가 있어요. 아까 그 저 김자야 여사만 백석 좋아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백석의 시를 보고 너무 좋아서 쫓아다닌 송준이라는 그 젊은이가 백석의 모든 자료를 얻어 가지고 사진도 얻고 북한에서의 자료 다 얻어서 백석 전집을 내고 백석 일대기를 쓰고 그랬어요. 제가 백석 논문 많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여대 가서 있은지 얼마 안 돼서 전화가 왔어요. 전 송준이라는 사람인데 백석의 일본에서의 자료 만주에서의 자료 북한에서의 자료 사진 제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선생님하고 의논을 드리겠다고 북한 자료 만주 자료를 가지고 있다니 간첩이구나 나에게도 올 것이 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또 온다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내 연구실로 와라. 다방에서 만나면 이제 다방에서 접선을 했다고 할 거고 연구실은 공개된 자리니까. 그 왔는데 아주 천진해 보이는 한양대 경제과 나온 본명은 따로 있고 필명이 송준 그 사람이 와 가지고 백석의 자료 자료를 보여 주는데 이 사진 보고 내 기절할 뻔했어요. 우리는 1963년 이후로 백석의 문학이 잡지에 전혀 안 나와요. 북한의 문학잡지나 신문에 백석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63년경에 숙청당해서 죽었겠다 아오지 탄광으로 가 죽었건 그러겠다고 했는데 이분이 85세까지 살았다니 96년까지 그래서 참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송준은 그때 이 백석의 일대기를 써 가지고 책을 두 권 냈는데 그 두 권을 내면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그래요. 한국의 최고의 시인의 전기를 쓰는 썼는데 누가 안 읽어보겠습니까. 세상 물정 모른 거죠 너무 순진한 거예요. 여기 많은 공무원 분들이 계신데 150명 백석을 아십니까 그랬더니 몇 분만 알겠다고 했잖아요. 백석 누가 알아요? 그 책 두 권 내 가지고 완전히 망했죠 그 사람. 서초동에 출판사 차려 가지고. 그 임대료 비싼 서초동 7층의 건물에 딱 해서 사무원 하나 두고 전화 두 개 두고. 그 당신 망할 거다 그래. 아닙니다. 백석을 우리가 알아야죠. 백석을 모든 사람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만 사랑할 텐데. 일 년 후에 왔는데 폭삭 망해 가지고 그 퉁퉁하고 잘생기던 얼굴이 아까 김종삼처럼 돼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암이 걸렸대요 그다음에. 그러더니 다시 암을 고쳐서 지난번 백석 백 주년 이분이 1912년생이니까 2012년에 이 송준이가 다시 나타나 가지고 백석 전집 새롭게 내고 백석의 또 그 전기 그것도 더 보충해서 또 책으로 냈어요.

 

이런 시를 썼습니다. 1938년 4월 함흥에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 할 때 영어 교사 하고 멋쟁이 외모를 가지고 있고 한데 바다의 그 출렁이는 물결을 닮은 그런 머리형을 가진 백석이 이런 토속적인 이게 함경도 함경도의 장날 거리예요. 거리는 장날이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장날로 우리를 다 끌고 와요. ‘거리는 장날이다/ 장날 거리에 영감들이 지나간다/…//’ 나이 든 사람들이 ‘…/ 영감들은/ 말상을 하였다 범상을 하였다 족제비상을 하였다/…//’ 아주 험하게 생겼어. 어떤 사람은 말처럼, 어떤 사람은 호랑이처럼 ,어떤 사람은 쪽제비처럼. 코도 이상해서 어떤 사람은 개 개발처럼 이 개발 쇠뭉덩이 이렇게 이렇게 된 개발코를 했고, 어떤 사람은 말안장처럼 가운데가 푹 들어간 코를 했고, 질병은 항아리 어떤 사람은 항아리처럼 커다란 코를 했어요. 아주 야성미가 있죠. 야성미. 함경도에 그 장사하는 영감들 상인들 그런데 이 상인들이 그 코에 생긴 건 전부 무식해 보이고 호랑이 같고 말 같고 개발코라 했는데 모두 안경을 꼈어요. 안경. 안경을 꼈다는 건 뭐냐. 글자도 보고 계산도 하고 다 모든 걸 볼 수 있다 이거죠. 확실해요. 돋보기입니다. 안경을 꼈다. 안경도 최고급 안경이에요. 돌체 돋보기다. 석영을 갈아 가지고 만든 고급 돋보기 대모체 돋보기. 그 바다 꽃, 바다 거북이 바다 거북이의 등껍질로 만든 최고급 돋보기 로이드 돋보기 로이드는 그 당시에 유명한 희극 배우예요. 찰리 채플린 나오기 전에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이도. 네, 이 로이도 돋보기가 동그래요. 동그래. 그래서 유행했어요. 그래서 최신 유행 돋보기를 그러니까 이 함경도 장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번 거죠. 글자도 알고, 계산도 하고, 장사해 가지고 생긴 거는 아주 말처럼 생기고 뭐 개처럼 생겼지만 돈 벌어서 고급 돋보기 끼고서 장사하고 ‘…/ 영감들은 유리창 같은 눈을 번뜩거리며/ 투박한 북관 말을 떠들어대며/…//’ 함경도 말 야 이 간나 새끼야 뭐 이러면서 함경도 말을 떠들어대며 ‘…/ 쇠리쇠리한 저녁해 속에/ 사나운 즘생같이들 사라졌다//’ 함경도에서 장사하는 나이 든 사람들의 그 야성적 생명력, 그 밑에 간직되어 있는 우리 민족의 어떤 끈질긴 힘 같은 것, 그리고 혼자 독학을 해서 글자도 깨치고 이 계산하는 것도 깨쳐서 장사해서 돈을 벌어가는 이 생활인들의 모습 이거를 시로 썼어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그다음에 또 보는데 이거는 ‘북신’이라는 시입니다. 조선일보에 김자야랑 동거를 하다가 조선일보 사표 내고 만주로 이주하려고 했다가 김자야는 잠적을 하고 그러니까 평안도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서행 서행이라는 서쪽 서쪽이라는 저 여기 북관이 요게 관북이니까 함경도고 관서 지방 서관 요건 평안도죠. 그래서 이제 서관 지역 평안도 지역을 여행했는데 그중에 북신이라는 지명이 있어요. 북신현면 여기 기차가 서요. 북신현면에서 기차가 내려서 한이 킬로 올라가면 묘향산입니다. 평안북도 묘향산. 그러니까 북쪽에 아주 금강산 다음에 절경이죠. 묘향산에 보현사라는 절이 있고 보현사 대웅전 부처가 일제시대 국보에 해당하는데요. 국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이 있었어요. 육이오 전쟁 때 다 불타버렸어요. 그래서 유홍준 씨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보니까 묘향산 보현사를 찾아갔는데 복원을 해 놨다. 이거 복원 근데 깜짝 놀랐어요. 그걸 보고 하급 보현사 대웅전이 그냥 있나 다 불탔다는데 근데 역시 새로 싹 단장해서 이상해 보이는 불상이 있더라, 일제시대 그 유명한 향산 부처님은 볼 수가 없더라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묘향산 올라가는 일 킬로 좌우에 전부 메밀국수 집이 쪽 연이어 있었다는 거예요. 메밀국수 집이. 그래서 묘향산 올라가다가 메밀국수 먹고 내려오다가 메밀국수 먹고 미래 북방 한계선은 황해도 강원도 지역 북쪽에서는 미리 재배 안 됩니다. 따뜻한 지역에서나 미리 되죠. 그리고 메밀은 찬 곳에서 잘 돼요. 냉대 지역에서 그래서 이제 남쪽의 강원도라든가 경북의 고지대에서는 메밀이 되죠. 그건 낮은 곳에선 메밀이 안 돼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 그래서 북쪽의 국수는 다 메밀국수예요. 그냥 국수 하면 으레 메밀이지 미리 안 자라니까 있더라도 비싸니까 그래서 메밀을 가을에 수확해 가지고 가루를 만들어서 반죽을 했다가 봄까지 국수 뽑아 먹는 거죠. 그래서 메밀국수는 연합니다. 질기지가 않아요. 함흥 함흥냉면은 감자 가루로 하므로 질기고 원래 평양냉면은 메밀이 많이 들어가서 잘 끊어져요. 그래서 가위로 자를 필요가 없는데 요새는 뭐든지 가위로 잘라요. 가위 난 그래서 국수 옛날에 생일에 국수를 꼭 올려놨거든요. 국수처럼 길게 오래 살아라 명이 길라고. 그런데 요즘은 국수만 나오면 가위로들이 잘라 명이 짧아져 가지고 참 암 걸려 죽고 그러는 게 아닌가.

 

여러분들 절대 그 국수 잘라 먹지 마세요. 함흥냉면은 질기지 않냐 그래도 그거를 한 번만 잘라 가지고 매운 채로 후 훌훌해서 한입에 꿀꺽 여기 나오는 이 사람들처럼.‘…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리인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에 치는 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커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고구려의 국기를 튼튼히 했던 소수림왕 그다음에 고구려의 영토를 가장 넓게 넓혔던 광개토대왕 그 왕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선조가 아니냐. 고구려 백성들 시커먼 모밀국수에다가 두꺼운 돼지고기 탁 얹어 가지고 한입에 먹어 한입에. 그런 야성미가 있어야. 아까 그 함경도 이 장사하던 노인들의 이런 야성미가 평안도로 그대로 이어져 있어 그걸 발견한 거죠. 그래서 이제 여러분도 평양면옥 평양냉면 먹을 때는 제발 그냥 끊지, 가위로 자르지 말고. 서울에서 평양면옥 제대로 하는 곳은 장충동에 평양면옥 그다음에 저 논현동의 평양면옥 을지로에 을지면옥 동국대 후문 뒤쪽에 필동면옥 고 정도입니다. 그니까 지방에서 오신 분들 많은데 내일 끝나면 삼삼오오 냉면집에 가서 좀 냉면 좀 드시고 가세요. 저하고는 아무 관계없어요. 전 이북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이런 야성적인 생명력을 가진 산골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뜨끈하고 거기서 우리 고구려의 국기를 든든히 했던 영웅들이 생각난다, 이 영웅의 후손들이 우리들이 아니냐. 근데 왜 이렇게 약해져 가지고 식민지가 되고 만주를 떠돌고 이러는가. 그런 말은 차마 못했죠. 그러나 그 마음이 속에 담겨 있었으니까 이런 시를 썼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만주에 가서는 더 가슴 아픈 시를 쓰고 그렇게 하다가, 이제 해방 후에 귀국을 해서 아까 말한 것처럼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이제 남북의 그 정권의 역사를 보면서 젊은 사람 중에 1980년대에 그런 주장한 사람 꽤 많았고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한 곳은 북쪽이다. 항일 조국 광복 투쟁에 가담을 한 항일 투사들이 주역이 되어 가지고 지주와 친일파를 숙청하고 그리고 토지개혁 해 가지고 평등의 조건을 만든 다음에 나라를 연 우선 항일 무력 투쟁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부터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부터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게 아니냐 남한은 오히려 친일파를 이용해서 그 한민당의 지지를 받아 가지고 이승만이 대통령이 됐고 또 미군의 지지를 받아서 미군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니까 그리고 친일파 청산, 청산 안 했고. 지주도 대충 넘어가. 토지 개혁 적당히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북쪽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다라는 주장. 내가 80년대 충남대 가니까 거기 젊은 사회학과 교수도 그 말 하고 학생도 그 말 해요. 그리고 지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보여 주고 싶은 자료가 있어요. 1950년 8월 15일 1950년 8월 15일 그때 9월 15일에 이제 인천상륙작전 했어요. 그로부터 한 달 전이니까 낙동강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인민군 세상이에요. 그래서 이제 낙동강만 함락시키면은 부산 쳐들어가 가지고 대한민국은 없어지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세상이 되는 거죠. 그럴 때 1950년 8월 15일에 서울에서 나온 인민일보, 그다음에 평양에서 나온 또 조국인민일보. 이 두 개의 신문인데 내용이 똑같아요. 한쪽에는 스탈린 한쪽에는 김일성을 놓고서 이 1950년 8월 15일이 위대한 소련 군대의 무력에 의해 조국이 해방을 맞은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위대한 원수 스탈린에게 축하하고 그리고 김일성 수령에게도 축하한다. 그런 기사가 평양과 서울에 동시에 신문에 나왔어요. 이 얘기는 뭐냐. 1945년 8월 15일에 소련의 위대한 무력에 의해 가지고 우리가 통일된 것처럼 1950년 8월 15일에도 소련의 군사적 지원에 의해 가지고 우리가 통일 전선에서 승리의 앞에 서 있다 그런 것이거든요. 그건 왜 남쪽은 미국의 후원을 얻어 가지고 개국을 했고 북쪽은 그렇지 않은데 하지만 육이오 시작하기 전에 중국 일본 다 가 가지고 김일성이 협약하고 양해각서 얻고 한 것은 이미 비밀문서가 지금 다 공개돼서 나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참 저 사람이 잘 나가다가 끝에 가 가지고 반동 반공 이데올로기로 끝내려는가 보다 그런데 저는 뭐 보수 골통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실이 그런 거예요.

 

백석 얘기를 좀 했어요. 그는 문학의 차원이 아니라 사상의 차원에서 비판을 받았다. 1959년 1월 초에 제가 이 얘기를 왜 하냐 하면 시야말로 가장 섬세한 것이어서 그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는지 아닌지를 시를 보면 안다 이거죠 저는. ‘평양을 떠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구경협동조합의 축산반에 배치되었다. 겉으로는 노동 계급 사상으로 개조를 하기 위해 자진해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중앙에서 추방되어 상수갑산의 그 상수로 쫓겨온 것이다. 1959년 1월 10일에 써서 문학 신문으로 보낸 편지에는 당의 따뜻한 배려에 의해 상수로 온 지 일주일이 됐고 동지들의 말씀과 격려를 새기며 정진하고 있다고 적었다. 수상 동지의 말씀을 받들어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여 당이 기대하는 붉은 작가로 단련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때 백석의 나이 48세였다.’ 남한에서라면 원숙한 문학 세계를 일구어갈 그 나이에 이 사람이 월남을 했더라면 김종삼처럼 그렇게 살진 않았을 거예요. 이미 일제 시대부터 유명한 시인이니까 대학교수가 됐을 거고, 서정주 이상의 그 우대를 받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나이에 백석은 이렇게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문학신문에 실린 관평의 양이라는 글에서는 좀 더 거센 노동 속으로 들어갈 뜻을 밝혀 농산반으로 옮겨온 뒤 노동의 기쁨을 더 누리게 되었으며 여기에 대해 당 앞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이 시인의 길이라고 노래하던 이 시인에게서 이와 같은 아부의 말이 나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때 이후 발표한 동시와 시는 모두 당파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가슴 치미던 증산의 결의 속에 긴장으로 일터에 나선다고 적었고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찬양하고 한없이 아름다운 공산주의의 노을이 비낀다고 찬양했다. 당을 기쁘게 하는 한평생이 되길 빌면서 당 앞에 드리는 맹세로 켜진 붉고 충실한 마음의 불을 노래할 때 이미 백석의 문학은 사라지고 없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박정희 군사 파쇼 불한당들을 천리만리 밖으로 차 던지라.’ 1962년에 쓴 시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너희들의 아버지 원수님을 찬양할 때 백석의 문학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과연 여기 우리가 문학사에서 본 백석 시의 문학적 정통성이 계승되려는가. 일제 강점기 그 혹한의 계절에도 볼 수 없었던 비굴한 아부와 일방적 미화가 드러나 있을 뿐이다. 북한의 체제와 사회가 민족적 정통성을 유지한 것이라면 시인 백석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줬을 리가 없다. 이것이 한 치의 가감이 없는 사태의 실상이다.’ 한 치의 가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오늘 강의를 끝내게 됐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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